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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섬 Apr 12. 2024

기억을 나누어 먹기

소설이거나 실제거나 아무거나

글쓰기 모임이 있다. 니체의 <비극의 탄생>을 읽으면서 글을 쓰는데, 거기에서 숙제를 받았다.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써오라는 것이다. 나는 주저 없이 이 순간을 썼다. 


삶의 팔 할은 불안이 채운다. 그러고 보니 이 불안증이란 종자는 벌써 삼십 년의 시간을 넘어 무럭무럭 살이 쪄서 내 안에 여전히 이리저리 비집고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삼십 년 전의 불안은 지금 것에 비해 가소로웠다. 이유도 크기도…… 이 말을 하고 자빠진 2024년을 살고 있는 나도 가소롭기는 매한가지이지만 말이다.       

  1995년 가을, 그날도 불안했다. 추석 연휴가 시작되기 전날이었다. 바로 전 해, 단어 그대로 참혹한 실연을 당하고 난 뒤 앓는 데에만 한 반년을 넘게 썼다. 스무 살. 하고 싶은 일도 많을 것이고 조금만 고개 돌리면 재미난 일도 얼마나 많은데, 그걸 그렇게 ‘나 실연했네’ 하고 허망하게 보내 버렸는지. 지금은 그때의 나에 대해서 조금도 관대하지 않기 때문에, 그저 쪽팔림과 후회 정도만 남아서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이지만, 그때는 그럴 사정이 충분했을 것이다. 그까짓 사랑 때문에 앓아 누울 만한 고통이 마음을 날카롭게 베고 있었을 것이다. 

치열한 여름이 지나고, 창밖으로 선선한 바람이 부니까 내 마음도 좀 살겠다 싶었다. 막상 명절이 되면 특별하게 재미나는 일도 벌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예나 지금이나 설이나 추석 연휴를 앞두고는 조금 설렌다. 마침 친하게 지내던 신부님에게 전화가 왔다. 같이 낚시를 가잔다. 


 서울을 조금 벗어난 의정부 쪽에는 신부님들만 가는 낚시터가 있었다. 아마 중고등학생들 수련회도 함께 하는 곳으로도 기억에 남는다. 신부님들에게는 일요일이 최고로 바삐 일하는 날이고, 오히려 전날부터 전국 직장인들의 오장육부 울렁거리게 하는 월요일은 쉬는 날이다. 아직은 삼십 대 젊었던 신부님의 취미는 낚시여서 월요일이면 거의 빠짐없이 그 낚시터에 간다고 했다. 이날은 명절을 앞두고 본가 가기 전 낚시를 하러 간다 했고, 나도 무작정 그 길을 따라나섰다.      


  처음 가보는 낚시터였다. 모자를 쓴 낚시꾼들이 드문드문 앉아 있었다. 모조리 물 쪽을 향해 혼자 앉아 있었고, 동행이 있는 건 우리 둘이었다. 가끔 꼬르륵 물소리가 가끔 났을 뿐 주변은 조용했다. 

낚시는 꽤 따분한 취미였다. 안 그래도 열 살도 훨씬 더 많은 신부님과 가까이에 앉아 있는 것도 영 어색한 일이었는데, 낚시할 때는 말 한마디 나누지 않는 것이 그들, 강태공들의 룰인 것 같았다. 게다가 30년 전엔 지금처럼 손바닥 안에서 영화를 보거나 음악을 들을 시절이 아니었다. 그저 시간이 흐르면 흐르는 대로 ‘쌩으로’ 견디거나 즐겨야 했다. 

신부님은 나보고 물고기를 잡아 보라고 했다. 알겠다고는 했지만, 내가 걔네들을 낚기 위해서 딱히 할 일이 없었다. 낚싯대는 어딘가에 걸쳐져 있었고, 입질이 들어오면 릴을 돌리라고 했는데, 그럴 일도 없었다.  

     

  나는 이때 두 학기째 휴학 중이었다. 휴학의 사유는 조금 전에 이야기했던 실연으로 인한 상사병이었다. 상사병이라는 것이 얼마나 괴롭냐면, 낮이고 밤이고 그 사람이 나를 떠나갔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믿기지 않음’이라는 감정이 홍수처럼 밀고 들어와서 숨을 잘 못 쉴 정도였다. 내가 조금만 힘을 내서 걸어 가면 바로 거기에 그가 서 있을 것 같았다. 어딘지도 모르면서. 

이 날은 2학기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을 무렵이었으니 다음 해 봄, 복학하기 전까지 시간이 몇 개월 남아 있었다. 아마도 그 빈 시간 동안 등록금을 벌려고 준비하고 있었던 것 같다.

“복학하기 전까지 뭐 하려고?”

신부님이 찌에 고개를 고정해 놓고 물었다. 뭐라고 대답을 했었을 것은 같은데,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바로 다음 훅 치고 들어오던 질문과 설명이 명확하게 기억난다. 

“너 아침마다 내 방으로 출근해라. 컴퓨터 있지? 그것만 가지고 와. 그래서 나랑 번갈아 가면서 하루 종일 컴퓨터만 보고 있어. 그렇게 합심해서 돈을 버는 거야.”     


  지금 머리도 별반 다를 바 없지만 이때는 신부님이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더더욱 알 수 없었다. 컴퓨터 한 대 갖다 놓고 죽치고 앉아 지켜보라고 했던 것이 바로 ‘주식’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삼성전자’ 주식이었다. 갑자기 무서워졌다. 주식은 사기꾼들만 하는 것이라고 알던 터라 아무리 이 사람의 직업이 신부라지만, 오히려 그 알쏭달쏭한 정체가 더 무서웠다. 낚시터에서 그냥 나가버리고 싶었는데 어떻게 집으로 가는지, 집에서 얼마나 먼지 그마저도 알 수 없었다. 무릎을 끌어안고 조용히 앞만 쳐다보고 있었다. 다시 지루해졌다.      


  일어나서 기지개를 한 번 켜고 돗자리에 누웠다. 얼굴로 따가운 햇살이 쏟아졌다. 눈은 부신데, 저 하늘 아래 높이 뻗은 나무들이 또렷하게 보였다. 어린 시절, 미술학원 다닐 때 선생님이 맑은 하늘은 이 물감으로 칠하라고 했던 그 알파 물감 파란색의 하늘이었다. 넓게 펼쳐진 나뭇잎의 초록과 태양빛까지 겹쳐 더욱 시린 파랑으로 보였다. 그리고, 낚시터가 조용했다고는 이야기했지만, 그것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는 이야기일 뿐 나무들은 바람에 흔들리며 계속 풍경 같은 소리를 만들어 냈다. 가을의 나무는 봄이나 여름 나무의 소리와 다르다. 절정의 무더위를 지나고 슬슬 바람이 차질 무렵의 나뭇잎들은 서로 부딪칠 때 특유의 바스락 소리를 더욱 크게 낸다. 하루, 하루 낙엽이 되어가는 나뭇잎들이 부딪혀 내는 또렷한 소리. 

촤아아아아~ 촤아아아아~ 촤아아아아~ 

두 팔을 머리 뒤에 내리고 누워 바라보던 그날의 하늘, 나무, 바람, 물 냄새, 나뭇잎 부딪치는 소리…… 이 순간, 이 장면은 나에게 30년 동안 남았다. 어느 때고 기억하면 서랍에서 사진을 꺼내어 보듯 나온다. 몸이 늙어서 기억이 흐려지기 전까지는 이날은 계속 남아 있을 것이다. 삼성전자 주식 따위…….     

 

  그날, 성당으로 돌아와서 신부님과 회를 나누어 먹었다. 물론 소주도 나누어 먹었다. 술이 조금 들어가면 신부님은 이것저것 더럽게 잘난 척을 해댔다. 신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어떤 명문대를 다녔었는지, 지하철 노조 파업 때는 본인이 명동 성당에서 노조 위원장을 설득하여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게 했다고 몹시 자랑스러워했다. 당시만 해도 명동 성당, 그리고 김수환 추기경은 노동자들에게 성역이었고, 정신적 지도자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나는 그 비루한 잘난 척을 다 듣고 앉아 있었다. 회를 좋아하기도 해서 그랬지만, 단 하나……. 나를 떠나간 그 사람 소식을 듣고 싶어서였다. ‘내가 지난해 이 사람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면 한 마디라도 흘려주겠지.’ 그 심산이었다. 게다가 신부님은 나에게 그 사람과 헤어지라고 종용하던 주동자 아니었던가. 내가 사랑하던 사람은 이 성당의 신학생이었다. 

“형준이, 결혼한다.”

다시 신학교로 복학해서 4학년 마친 것만 알았지, 결혼하는 것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내가 결혼할 사람 소개해줬어. 내가 시켰어.”

이 와중에도 신부님은 묘한 뻥을 섞어가면서 잘난 척을 한다. 결혼이라는 인륜지대사, 그것도 자기는 한 번도 안 해본 결혼을, 그것도 ‘남의’ 결혼을 쥐락펴락 마음대로 시킨다고? 말도 안 돼. 그런데, 지금 신부님의 행패를 왈가왈부할 때가 아니었다. 나랑 헤어지고 얼마나 됐다고…… 기가 막혔다. 일 년 가까이 가슴앓이를 하고 휴학까지 해버린 내가 머쓱할 지경이었다. 이것은 내가 그리던 비련의 시나리오랑 방향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래서 또 다른 여자를 만났다고? 결혼까지 한다고? 나는 이렇게 기다리고 있는데? 사랑의 완성은 말이다, 이렇게 한 사람을 오랫동안 가슴에 품고 기다린 순애보적 인물의 손을 들어주면서 마무리 지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신은 눈보라를 맞으며 무릎 꿇고 망부석이 되어 버린 황장군의 편을 들어주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미안하지만, 형준이 인생이라는 연극에서 너는 주인공이 아니었어.”

안 그래도 이 순간, 쪽팔림과 경악으로 두근대는 내 심장을 아주 단칼에 쫙 찢어놨다. 

“그럼요?”

그래도 조연 하나라도 얻을 수 있을까 싶어서 기를 쓰고 쓸데없는 질문이라도 던져봤다. 

“넌 단역도 안 돼. 지나가는 사람 3이야.”

이날, 위로 죽죽 뻗은 미루나무들이 내준 풍경과도 같은 소리와 그 높다란 하늘 풍광은 ‘지나가는 사람 3’과 신부님의 비루한 ‘잘난 척’으로 어쩌면 더 아름다운 것으로 윤색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1995년 9월 7일. 목요일.      


    


  작년 겨울에는 어떻게 하다가 한참 만에 연락이 닿아서 신부님과 같이 감자탕에 소주를 나누어 먹었다. 나는 어느덧 오십 살이 되었고, 신부님은 환갑이 훨씬 넘어 버렸다. 용케도 앞머리 훌떡 까짐은 면하셨다. 신부님 앞머리 모근도 참, 오랜 세월 근근이 버티다니 대단했다. 술이 한 순배 들어가니 또 시동이 걸리려고 한다. 순간, 한 마디 툭 던진다. 

“나 잘난 척 이제 안 한다. 잘난 척 끊었어.”

나는 속으로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면서도 오랜만에 만난 신부님 앞에서는 계속 생글생글 웃으며 감자탕을 퍼먹었다.      

‘웃기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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