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면 모든 것이 해결될 거라 믿었다
(앞서 발행한 '이혼하는 마음'과 내용이 이어집니다)
사람의 직감은 때론 빅데이터만큼 정확하다. 집에서 해도 될 이야기를 굳이 내가 있는 곳까지 와서, 그것도 늦은 밤에 만나자고 고집을 부릴 때부터 심상치 않았다. 내 안의 빅데이터는 흔들림 없이 한 지점을 가리켰으나, 애써 부인했다. 설마, 아니겠지. 감히, 아닐 거야. 그래서인지 그 사람의 첫마디를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올 것이 왔다'였다.
어떻게 당신이? 당신이 나한테 감히? 기가 찼다. 그리고 억울했다. 배신감에 분노가 끓다가 이내 두려움이 엄습했다. 앞으로 내 인생 어떡하지? 주홍글씨를 달고 살아야 하는 건가? 정말 헤어지게 되면 당장 생계는? 주변에 뭐라고 알려야 하나? 난 다시는 빛을 볼 수 없는 깊은 구렁텅이로 빠지게 되는 걸까.
2020년 여름 그 사람 입에서 나온 이혼 사유는 2021년 내 입에서 나온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상대방이 강조한 지점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신뢰였다. 내가 참지 못하고 집을 나간 뒤로 그는 우리 관계의 신뢰를 잃었다고 했다. 더는 내가 본인이 알던 '내'가 아니라고 했다. 연애 기간을 합쳐 7년을 함께 한 사람에게 '네가 누군지 모르겠다'는 말을 들을 때의 기분이란 참담했다. 자아가 통째로 부정당하는 것 같았다. 다행히 거대한 문제 앞에선 이상하리만치 침착해지는 특유의 성격이자 장점 덕에 난 겨우 정신을 가다듬고 입을 뗐다. "여기서 결론 지을 수 없는 문제라고 봐. 1주일 뒤에 집에 들어가니까 그때 다시 이야기해."
내겐 가슴 아파할 여유 따윈 허락되지 않았다. 프리랜서 번역가로 막 데뷔를 하고 두 번째로 계약한 역서 마감을 일주일 앞둔 상태였기 때문이다. 차오르는 배신감, 분노, 억울함, 두려움을 있는 힘껏 밀어내고 막바지 번역 작업으로 머릿속을 채웠다. (일요일 저녁 남편에게서 이혼하자는 말을 듣고 다음 날 아침 책상에 앉아 노트북 키보드를 두드리던 모습을 떠올리니 스릴러 혹은 하이퍼리얼리즘 영화의 한 장면 같기도 하다.) 초능력을 발휘해 마감을 친 뒤, 나는 지금껏 한 번도 하지 않았던 행동을 하기로 마음 먹었다. 떠난 사람의 마음을 되찾아오자고. 불가능에 가깝지만 이 미션을 향해 몸과 마음을 던져보자고. 이 생각이 얼마나 자기파괴적인지 상상도 못 한 채.
"우리의 잘못은 서로의 이름을 대문자로 착각한 것일 뿐.
네가 울 것 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면 나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하겠다고 결심한다.
네가 없어지거나 내가 없어지거나 둘 중의 하나라고."
- 이제니, 시집 <아마도 아프리카> 중에서 -
미션을 수행하면 할수록 내 존재는 깎이고 깎여 초라해졌다. 나를 거부하기로 작정한 사람에게 계속 다가가는 건 자의식을 무너뜨리는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차분하게 대화하면 그 사람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다시 이야기해보자며 눈물로 호소해도, 최소한 부부 상담이라도 받아 보자며 이성적으로 접근해도 상대는 철저히 무반응으로 일관했다. 언어는 떠난 이의 마음을 붙잡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전략을 바꿔야만 했다. 양가 어른들의 조언으로 나는 우렁각시의 탈을 쓰기로 했다. 그 사람의 기분이 어떻든, 나를 투명 인간으로 취급하든 말든, 밥상을 차렸다. 일어나 시장을 보고 재료 손질을 하고 점심 식사를 차리고 뒷정리를 하고, 조금 이따 다시 저녁을 차리고 다음날 먹을 밑반찬을 만들고, 그렇게 내 하루는 오직 상대방의 식사 스케줄에 맞춰 돌아갔다. 밥을 차려야 한다고 오랜만에 보는 친구와의 약속도 미룰 정도였으니 지금 생각하면 참 대단했다 싶지만 그때의 난 절박했다. 어떻게든 이혼만은 막고 싶었으니까. 이건 누가 시킨다고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 행동을 사랑이라 말할 수 있을까? 정말 그를 사랑해서 그토록 절박하게 매달린 걸까?
누구보다 '집밥'을 중시하던 그 사람은 나의 새로운 전략에 점점 마음이 풀어지는 듯 보였다. 톰 크루즈도 아닌데 난 기어이 미션 임파서블을 파서블로 만들어냈고, 그 사람을 다시 대화 테이블에 앉히는 데 성공했다. 이야기끝에 우리는 부부상담을 받아본 뒤 혼인 관계 지속 여부를 결정하자고 합의했다. 그런데 이 어려운 일을 해냈는데도, 붙잡고 싶었던 사람을 붙잡았는데도 기쁨과 안도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되려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점점 선명해졌다. 결국 내가 원하는 대로 되었는데 왜 이런 찝찝한 기분이 드는 건지 도저히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며칠 후, 머릿속에 안개가 자욱하게 낀 채로 나와 그 사람은 부부 상담을 위해 심리상담센터로 향했다.
(이어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