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요일 밤 첫째가 목이 아프다고 했다. 반듯한 이마에 손을 얹으니 뜨끈한 기운이 올라왔다. 월요일 아침이 밝자마자 병원에 달려갔더니 독감이었다. 애 많은 집에 감염병은 그야말로 비상이다. 애들 어릴 때 독감이나 장염이 한번 훑고 지나가면 집이 쑥대밭이 되었다.
아래위로 쏟아내는 장염이 제일 큰일이었다. 망할 노로 바이러스 무섭기도 하지. 옷이고 이불이고 멀쩡한 게 없었다. 둘째 16개월쯤 됐을 때였나? 물 한 모금만 넘겨도 토하는 애를 둘러업고 병원에 갔는데 입원실이 없다고 했다. 탈수가 오면 눈물도 안 나온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축축 처지는 애를 어루만지며 급하게 다른 병원으로 달려갔다. 바로 입원하라는 원장님 오더에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넓게 벗어진 원장님 정수리에 대고 인사를 하고 또 했다.
코로나 때가 최고였다. 독감은 보통 2~3일 간격이고 장염은 거의 한 번에 다 같이 앓고 지나가는 편이었는데 코로나는 달랐다. 너무 조심해서 그런지 일주일에서 열흘 간격으로 옮았다. 그때는 집에 코로나 환자가 있으면 외출도 못할 시기라 거의 꼼짝없이 한 달을 간병만 했다. 그 와중에 남편은 처음에 혼자 걸려서 1주일을 혼자 어머님 집에서 격리생활하다 돌아왔다. 나는 확진되고 격리한 지 이틀 만에 첫째도 확진되는 바람에 찢어진 목구멍을 부여잡고 집에 돌아와 간병을 해야 했다. 어째서 남편은 편히 아프고 주부는 아파도 고달픈지 모를 일이다.
이렇게 시달리다 보니 역병이 돈다고 하면 온 신경을 곤두세우던 나였는데 이번에 방심하고 말았다. 아이들이 커서 덜 아프기도 했고, 수학학원 단원 평가에 또 무슨 수학시험까지 준비해야 한다는 애들을 데리고 병원에 갈 여유도 없었다. 시험이 다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 독감에 걸린 첫째에게 오히려 고마워해야 할 지경이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페라미플루가 있다. (녹십자가 개발하여 해외로 수출하는 국산 항바이러스제 1호!) 이 수액으로 말할 것 같으면 1회 주사 만으로 독감을 치료하는 명약 중에 명약이다. 지난봄 독감에 걸렸던 첫째가 이 수액을 맞고 바로 회복이 되었다. 덕분에 둘째 셋째에게 옮기지도 않았고 바로 열이 내리고 몸이 나아져 금방 등교도 할 수 있었다. 비용은 물론 비싸지만 실비보험으로 돌려받을 수도 있고 무엇보다 빠르게 치료가 되니 가족 내 전염 우려가 적다. 다자녀 가족에게 이것만큼 중요한 게 없다.
독감수액을 맞히고 0이 여러 개 찍힌 영수증을 들고 집에 왔다. 소파 제일 구석에 아이를 앉혀놓고 리모컨을 손에 쥐어주었다. '옛다. 오늘 너에게 천국을 선물해 주마.' 몸살 기운에 얼이 빠진 아이가 짠하기도 했지만 나는 안다. 어린애들은 몸이 찢어지게 아파도 학교만 안 가면 괜찮다. 아이는 금방 TV에 빠져들었고 뒹굴뒹굴하다가 밥때가 되니 배고프다고 했다. 어찌해도 식욕을 잃지 않는 대단한 첫째였다.
학교에서 돌아온 둘째 셋째가 첫째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학교를 빠졌다니! 그것보다 부러운 게 뭐가 있으랴. 코로나의 악몽을 되살리고 싶지는 않아 얼른 첫째에게 마스크를 씌웠다.
월요일은 병원에 다녀오니 금방 지나갔고 화요일은 조금 지루했다. 그리고 화요일 저녁 이틀이나 학교에 안 가는 첫째를 바라보는 둘째와 셋째의 시선이 예사롭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쓰레기를 버리러 다녀온 사이 둘째와 셋째가 첫째에게 딱 붙어 말했다.
"내 손 한 번만 만져줘. 나도 옮아서 학교 빼보자."
"나도. 나도!"
"당장 떨어지지 못해!"
내 불호령에 아이들은 사사삭 제 방으로 흩어졌다. 하나라도 옮기만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속으로 다짐했다.
월요일에 수액 맞고 열이 내린 후로 아이는 편안해했다. 수요일에 병원에 가서 등교 소견서를 받고 바로 학교에 갈 수 있었다. 그리고 목요일 저녁 막내 목이 따끈했다. 아직은 미열이었지만 금요일 남편 휴가를 내고 라운드까지 잡아 놓은 상태라 나와 남편 눈에 불이 켜졌다. 눈이 마주친 나와 남편은 재빨리 애를 싣고 병원으로 달렸다. (남편과 나는 골프에 있어서만은 완벽한 팀워크를 보인다.) 다행히 야간 진료를 보는 곳이 있었다. 독감이 분명하니 주사 좀 놔달라고 간곡히 애원했다. 의사 선생님은 이제 막 열이 오른 아이는 독감 검사 해도 소용이 없다. 현재 상태로는 감기 초기 증상에 가깝다고 하시며 독감주사는 안된다고 하셨다. 그러고는 염증주사 한 대 놔줄 테니 잘 쉬고 경과를 보자고 하셨다.
아이는 땀을 한 바가지 쏟고 푹 잤다. 다행히 그 뒤로 열이 좌악 내렸고 아침이 되자 멀쩡해졌다. 독감에 걸려 학교에 안 가겠다는 목표가 무너졌다. 아이는 계획이 틀어졌다며 울면서 학교에 갔다. 부부는 무사히 라운드를 마쳤다. 그리고 토요일 아침 막내가 무섭게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이건 무조건 독감이었다. 가자 수액 맞으러! 하필 토요일에 열이 오른 아이는 낭패감을 감추지 못했다. '토요일에 열이 나다니! 토요일이라니!' 막내는 몇 번이나 중얼거렸다. 역시나 열은 바로 잡혔고 일요일까지 푹 쉬었다.
일요일 저녁 둘째가 열이 나기 시작했다. 아이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올 것이 왔구나. 최대한 빨리 주사를 맞는 게 좋다. 월요일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병원으로 내달렸다. 놀랍게도 독감 음성 코로나도 음성이었다. 다만 아직 열이 있으니 지켜보고 오후에도 열이 나면 다시 검사를 해보기로 했다. 재검이 필요치 않게 아이는 열이 내렸고 컨디션은 좋아졌다. 독감이 아니었다. 그냥 감기로 하루 쉰 아이를 바라보니 알 수 없는 감정이 밀려들며 다리 힘이 빠졌다. 첫째 때처럼 소파에 앉혀두고 리모컨을 쥐어주었다. 아이는 방에서 뜨개질감을 들고 와 뜨개질을 하면서 TV를 보았다. 얼굴이 어찌나 평온한지 부처가 따로 없었다. 나는 사바세계 중생이고.
하교한 막내가 소파에 앉아있는 둘째를 보고 도끼눈을 떴다. 독감이 아니라는 말에 거의 이성을 잃었다. 언니는 독감이 아닌데도 학교를 쉬었고 저는 독감이었는데도 학교에 갔다며 부르짖었다. 잔소리할 힘도 없었다.
막내야 인생은 원래 그런 거다. 엄마도 알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