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의 양면
고등학교 때 한 선생님이 농담 삼아 자주 하시던 말씀이 있었다.
"인생무상 삶의 회의!"
마침 담임선생님의 성함이 '무상'이어서 재미 삼아 던지시던 농담이었는데 묘하게도 귀에 박혔다.
'인생이 무상하니 삶에 회의를 느낀다.'는 뜻으로 해석되어 의문이 가시질 않았다.
'인생이 무상한데 그것이 꼭 회의스런 일일까?'
이 의문에 답을 얻게 된 것은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뒤였다.
무상(無常)이란 쉽게 말해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말이다.
인생이 무상하다고 하는 말은 영원한 것이 없어서 아무리 튼튼해 보여도 결국 다 스러져 간다는 뜻으로 쓰인다.
인생의 우여곡절을 겪고 나서 허무감을 느끼며 "인생이 무상하구나!" 하며 탄식하는 노인의 모습이 그려진다.
'어차피 변해서 사라져 갈 것인데 그리 안달복달할 것 없지 않으냐' 하는 맥락으로 쓰이기도 한다.
곰곰 생각해보면 인생이 무상한 것은 맞다.
그런데 늘 변하는 것이라 해서 그것이 꼭 허무하거나 부질없는 것일까?
불교를 공부하다가 '제행무상(諸行無常)'이란 단어를 만났다.
'모든 것은 다 변한다.'는 뜻이고 이것이 진리의 잣대라고 한다.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없고...'라는 시에서처럼 인간의 수명에 비해 인간을 담고 있는 산이나 강과 같은 자연은 변치 않고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시간을 길게 해서 보면 자연도 늘 변하고 있다.
지구만 하더라도 옛날 바다였던 곳이 땅이 되고 땅이 가라앉아 바다가 되었다고 하지 않은가!
모든 것이 변하는 것은 틀림이 없다.
그런데 변한다고 해서 꼭 허무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나를 가로막고 있던 장벽이 변해서 없어진다면 이것도 허무한 일일까?
아프던 몸이 건강하게 낫는 것도 기쁜 일이다.
변하는 것은 객관 사실이지만 허무하고 않고는 선택에 달려 있다.
허무함은 객관이 아니라는 말이다.
고등학교 시절에 가졌던 의문이 해결될 수 있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무상이란 말의 참뜻을 알게 되면서였다.
무상은 그냥 변한다는 객관 사실을 말하는 것이고 허무란 주관으로 가지는 기대와 연관되어 있는 감정이다.
그런데 왜 무상에서 허무를 연상하게 되는 것일까?
기대와 집착 때문이다.
변할 수밖에 없는 대상이 변하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에 막상 변하는 것을 볼 때 허무해지는 것이다.
삶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면서 절망하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종종 본다.
이들은 자신이 품은 뜻이 얼마다 실현 가능성이 있었는지 깊이 생각해 보았을까?
실제로는 변하고 있는 강산을 영원할 것으로 보는 것은 착각이다.
이처럼 주위 환경이나 객관 상황을 자신의 바람에 따라서 멋대로 해석하고 뜻을 일으키니 뜻대로 될 수가 없다.
현명한 사람은 무상함을 알고 그에 맞게 뜻을 낸다.
부푼 꿈을 안고 시작했던 일이 어느덧 그냥 생계수단이 되면서 죽지 못해 하는 일이 되었다면 어디서 잘못된 것일까?
자기도 모르게 '변하지 않을 것'이란 헛된 기대를 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변하는 줄 아는 사람은 변화에 실망하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무상의 도리를 아는 사람은 헛된 망상을 품거나 절망하는 법이 없다.
변화는 그 자체로 허무한 것이 아니다.
기대를 하고 그 기대에 집착할 때 변화가 허무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만약 실망을 하거나 허탈하고 허무하다면 자기 마음을 거슬러서 추적해보라.
무엇을 기대하고 집착하고 있었는지.
무상의 도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순간 허무감이 치유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