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생 김지영 소설을 읽고
다음 날 바로 영화를 감상했습니다. 소설을 읽고 난 후 느꼈던 것들이 영화에서도 그대로 느껴지는지 궁금했고 영화에서는 어떠한 부분이 달라졌는지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영화를 몇 분 보지 않고도 여러 문제점들이 보였습니다. 이미 유튜버들의 리뷰는 여러 번 봐서 문제점이 무엇인지는 아주 살짝 감지하고 있었지만 영화 전체를 보니 문제점들이 와닿을 정도로 감지가 되었습니다.
소설 82년생 김지영을 읽었다고 앞서 언급했습니다. 영화에 나오는 에피소드를 다 인지하고 있으며 지영이 어떠한 인물인지 그리고 지영이 어떠한 생각을 가진 여성인지 충분히 알고 있었죠. 하지만 소설을 읽지 않고 영화를 보신 분들에게 이 영화를 물어본다면 이 영화는 이상한 영화라고 할 것입니다. 저도 소설을 읽지 않았다면 영화 감상을 중단했을 겁니다. 소설에서는 지영이 어떠한 인물인지 충분하게 알고 설명하는 시간이 있습니다. 지영이는 어떠한 집안에서 컸으며 세세한 상황 설명들이 들어갑니다. 영화에서 세세한 상황 설명을 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적어도 소설을 읽지 않은 이들도 영화에 녹아들 수 있게 만들어야 했는데 감독은 아마 영화 관객들이 소설을 다 읽고 왔을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소설을 읽은 관객을 위주로 영화가 만들어졌다는 느낌을 지울 수는 없었습니다.
내러티브의 부재가 심각했는데 영화를 보는 관객들이 자연스럽게 영화에 빠져들 수 있는 인과관계 구조가 부족했습니다. 지영 씨가 왜 빙의가 되었고 어떠한 장면에서는 지영 씨의 감정이 어떠했는지 관객들이 느낄 시간도 없이 과거에서 현실을 자주 왕복하며 관객들을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특히, 과거 회상 장면들은 여성으로서 느꼈던 불합리함을 보여주는데 소설을 읽은 관객에게는'아 저 에피소드구나!'라며 느낌표로 문장을 마치면서도 의문을 가졌을 것이고 소설을 읽지 않은 관객들은'왜 저기에 저런 에피소드가?'라며 물음표로 문장을 끝마칠 영화였습니다. 물론 영화의 서사 구조가 기승전결로 완벽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뒤죽박죽인 상황에서도 영화 그 자체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하고 주인공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중간중간 등장하는 에피소드들과 나오는 대사들은 지영 씨가 가지고 있는 생각을 읽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방해하는 요소들도 많았습니다.
가장 심한 장면은 가장 처음 나오는 과거 회상 장면입니다. 어린 지영과 은영이 나누는 대화들은 소설을 보지 않은 입장에서는 너무 뜬금없습니다. 소설에서는 그런 이야기가 나오기까지 대한민국 구조와 남아선호사상 그리고 지영의 가족에 대한 설명들로 가득합니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너무나 갑작스럽게 은영은 한국인을 싫어하는 여자아이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은영이라는 인물이 왜 이러한 대사를 하고 한국을 싫어하는지. 하지만 이러한 장면을 넣고 싶었다면 적어도 어느 정도 영화가 진행된 다음에 넣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소설에서도 초반에 이러한 이야기를 했다고 이 에피소드를 초반에 넣는다는 것은 관객들을 설득하기에는 부족해 보였습니다. 시댁에서 일을 하고 지친 지영이 회상하는 장면치고는 동떨어진 기분을 멈출 수 없었습니다.
소설의 영화화는 신중해야 합니다. 우리가 읽었다고 해서 그 소설을 다 이해할 수 있는 사람도 많지 않고 소설의 모든 에피소드들을 머릿속에 꾸역꾸역 기억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영화로 만들면 독자들이 기억할만한 에피소드와 처음 보는 관객들이 영화를 소설 없이도 이해할 수 있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영화 82년생 김지영에서는 그런 힘은 찾아볼 수 없었고 처음 보는 관객에 대한 배려도 없었습니다.
삶은 호러입니다.
매 순간이 지겹고 아름다운 날은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지영 씨는 특히 더 그랬습니다. 그래서 특정 순간과 인물 앞에서 빙의를 하며 자신의 속마음을 다른 사람을 통해 전달합니다. 소설을 보고 이러한 방법은 훌륭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빙의는 주인공의 진짜 마음 혹은 영화 속 주인공들이 독자에게 던지는 메시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중요하기는 합니다. 하지만 절대 영화 전체를 흔들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소설을 읽을 때도 빙의 장면이 소설 전체의 장르를 변질시키는 느낌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영화로 넘어오면서 이 빙의 장면은 영화를 다른 장르로 변질시킨 기분입니다. 마치 영화 변신을 볼 때 가족들이 다른 인물로 변하는 것처럼 무서웠고 날카로웠습니다. 지영 씨의 빙의로 인해 다른 인물도 영향을 받았으며 그 파급력은 작지 않았습니다. 가족이 흔들렸고 인물 한 명 한 명의 생각에 영향을 끼치며 영화 전체를 흔들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빙의 장면은 몇 장면 나오지 않습니다. 수시로 사용한다거나 그 장면들을 함부로 사용하는 느낌은 없습니다만 그 잠깐 사용되는 빙의가 제가 느끼기에는 너무 강렬했습니다. 너무 강렬해서 영화의 다른 장면들이 평범해 보였고 실제로 에피소드들이 부각되어야 하는데 빙의가 더 부각되어 주객이 전도된 기분이 들었습니다. 게다가 장르의 파괴까지 느꼈으니 문제라고 의식할 수밖에 없었죠.
해리 포터에는 호크룩스라는 마법의 물건이 등장합니다. 볼드모트가 불사의 몸을 위해 영혼을 여러 개의 물체에 담아놓은 것이죠.
지영 씨는 자신의 과거 기억들을 호크룩스처럼 여러 물건에 담아놓았습니다. 현실에 있던 지영 씨는 갑자기 어떠한 물건을 보면 과거로 회귀해서 자신의 기억에서 불합리했던 부분들을 끄집어냅니다. 그런 장면들은 자연스러워 보이려고 노력했지만 처음 언급했던 관객에 대한 배려 부족과 소설 속 시대를 순서대로 보여준 것을 다 섞어버려서 이해하기 힘든 수준이 돼버렸습니다. 에피소드 하나씩 하나씩 살리려다 보니 지영 씨의 기억은 버스 정류장에서 스카프를 보고 고등학교 때 기억을 하고 방에 있던 세계지도를 보며 어릴 적을 상상하는 등 나이대별로 이야기를 이끌어가려고 노력은 합니다. 하지만 막상 관객이 보기에는 지영 씨의 기억들을 물건에 넣은 놓고 지영 씨가 그 앞을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느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저 지영 씨에 과거의 기억들을 조각 모음 한 것에 만족한 것처럼 영화는 끝나버립니다.
그러다 보니 정작 영화가 진짜로 말하고자 하는 바를 놓쳐버리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설은 남녀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요소들과 세세한 상황 설정들이 있어서 포스터에 쓰여있는 문구처럼 너와 나의 이야기라는 메시지가 맞는다고 치더라도 영화는 지영 씨의 기억을 조각 모음 하다 보니 너와 나의 이야기라는 문구가 전혀 와닿지 않았고 중간중간 남자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이야기를 넣어 우리 영화는 남녀 모두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싶다고 어필하지만 많이 부족해 보였습니다.
저는 영화가 마냥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위의 문제들이 있었음에도 영화 걸캅스와 같은 부류로 묶어서 영화를 보고 싶지는 않습니다. 사건의 순서 문제와 몇 가지 연출의 부족함이 있었지만 세련되게 표현하려고 노력한 작품인 것은 분명했기에 마냥 비난해야 하는가?라고 물으면 아니라고 답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