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살리는 피아노
오른쪽 다리를 다친 지 108일째입니다.
여름 내내 병원에서 지냈고,
가을이 되어서야 겨우 걸을 수 있게 됐습니다.
근력이 사라져 서 있는 것조차 힘들었지만,
이제는 목발 없이 몇 걸음 정도는 걸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계단은 두려워서,
조심스럽게 목발을 짚고 오르내립니다.
몸은 조금씩 회복되는데,
마음은 쉽사리 따라오지 않았습니다.
가정에서도, 일터에서도
조급한 성미가 자꾸 드러났습니다.
31살에 결혼하고
맡겨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왔는데,
몸이 아프고 나서야 ‘젊음’이 내 곁을
이미 떠나 있었다는 사실이 억울하게 느껴졌습니다.
올해 병원에 머무는 동안 고혈압 진단도 받았습니다.
지난주에는 혈압이 176까지 올라갔고,
이러다 정말 큰일 나겠다 싶은 마음에
병원에 가서 약을 처방받았습니다.
근심을 품고 살아가던 엄마를 보며
“나만은 그렇게 살지 말아야지” 다짐했었는데,
거울 속에 엄마를 닮아 있는 내 모습을 보고
마음이 조금 흔들렸습니다.
병원 치료 때문에 쉬었던
피아노 학원에 다시 가기 시작했습니다.
삶의 고민들이 머리를 짓누르자,
그냥 견디기만으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물여섯 살,
처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관심도 없었는데,
이상하게도 어른이 되고 나서야
건반을 누르고 싶어 졌습니다.
피아노 앞에 앉으면 마음이 고요해집니다.
복잡했던 생각들이 피아노의 울림 속에서
천천히 풀리고, 나를 짓누르던 무게가
조금 내려앉았습니다.
오랜만에 찾은 피아노 학원.
선생님은 예전처럼 환하게 “오랜만이에요” 하고
맞아주셨지만, 손끝은 굳어 있었고, 복잡한 코드는
쉽게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고민할 시간에, 나는 건반을 누릅니다.
걱정이 나를 현실 밖으로 끌어내
미래로 내몰려할 때마다, 나는 다시 지금 이 자리,
‘현실이라는 대지’ 위에서 건반을 하나씩 눌러봅니다.
피아노는 찬양이 되기도 하고,
좋아하는 노래가 되기도 합니다.
절뚝이며 페달을 밟는 내 모습을
안쓰럽게 바라보는 선생님과 아내가 있지만,
그래도 나는 피아노 앞에 앉고 싶습니다.
다가오지도 않은 미래가 내 하루를 삼키지 않도록.
불안이 생각보다 빨리 찾아오더라도,
나는 도망치지 않고 지금 이 자리에서
숨을 쉬고 싶습니다.
그래서 나는 피아노를 칩니다.
살기 위해 칩니다.
피아노의 음들은 조용히 나를 위로합니다.
그 위로로 하루를 버티고,
그 힘으로 다시 현실 속 나의 자리를 살아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