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제목을 입력하는 순간에 자꾸 오타가 난다. 몇 글자도 안되는데 손가락들이 살짝 떨리는 걸 보니 아마도 긴장선을 타고 있나 보다. 슬로비디오가 걸리고 시간은 꿈결처럼 흐른다. 조회하려는 책은 <멈춤을 멈추려 합니다>. 그리고 엔터.
주말 오후 도서관에는 어르신 두 분과 엄마와 딸, 자원봉사 여사님이 전부다. 이 작은 도서관의 사서 선생님은 새로 오셨나 보다. 어여쁘고 앳된 분이다.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독서 삼매경이고 창문에 매달린 햇살의 시간은 뚝. 딱. 뚝. 딱. 진중한 둔각으로 기우는 늦은 오후다.
이 정숙한 시공간에서 난 그만 소리를 지를 뻔했다. 겨우 겨우 셀프 입틀막을 하고 괜히 좌우로 호들갑을 떨고 나서야 스크린 화면에 집중한다. 이거 실화냐? 있다. 비치중. 대출가능. 2층 일반독서실. 818-김95ㅁ. <안내쪽지 인쇄> 버튼을 클릭한다. 그리고 꿀꺽.
책의 위치는 쪽지를 보고 찾아가면 될 일을, 자원봉사 여사님께 굳이 여쭤보고 어느 책장 앞에 선다. 너로구나. 서가의 책장에서 떨리는 검지 손가락으로 책등을 힘차게 당긴다. 와락 나에게 안긴다. 왔다. 나의 첫 책을 손 안에쥔다. 이건 말도 안 돼. 꿈이냐 영화냐.
얼마나 꿈꿔 왔던 순간인가. 도서관에서 나의 책을 만나는 순간이라니. 지난한 과거와 먹먹한 현재가 소리없는 미래와 한꺼번에 뒤섞여 쏟아진다. 기쁘고 반가운 소소함을 넘어, 인류 최고의 발명품이라는 책의 대열에, 고고한 서가의 숲에 어엿하니 함께 하고 있다는 느낌에 잠시 기분 좋은 현기증이 난다. 이 증상은 과잉된 자아와 과장된 허세의 문장이지만, 묘한 감사와 벅찬 감동의 마음은 진솔하니 고백컨데 분명한 사실이다.
책표지를 하염없이 어루만진다. 때로는 이렇게 물성이 갖고 있는 실존적 힘이 형이상학적 관념의 힘을 뛰어넘을 때가 있다. "보이지 않는 것도 읽고 세상 너머를 관찰하고 쓸 줄 아는 힘이 작가의 소양이고 소임이다"라고 누군가 말했고, 이 문장을 늘 소중히 품곤 하지만, 속세의 중생인 나에게 오늘 만은 예외다. 두 손안에 자리한 단단한 책의 실체적인 물성과 향기, 감촉 앞에서 나는 한참을 서 있었다.
미래의 어느 날, 누군가 도서관에서 이 책을 꺼내 빌려가는 장면도 상상해 본다. 이 얼마나 근사한 상상인가.
존재의 소멸 또는 부재 속에도 책이라는 입자가 남아서 누군가의 손과 눈에 그리고 마음과 영혼에 작가의 어떤 에너지를 전달하게 된다는 의미로 확장하면, 쓰는 일에 대한 태도와 책을 만들어 내는 수많은 사람들의 애정, 그들에 대한 감사에 이르는 여러 생각들이 빅뱅처럼 팽창된다. 책을 내는 마음의 근저는, 인간은 유한해도 오래도록 기억되고 싶은 욕망의 발현이려나. 삶의 단독자로서 자아실현, 자기표현을 관통하는 특이점 (Singularity)을 설명한 매슬로우의 욕구이려나. 아니면, 둘 다 이려나. 읽다만 책, 조지오웰 의 <나는 왜 쓰는가>를 다시 펼쳐봐야겠다.
"저 혹시 이 책, 어느 분이 희망도서로 신청하신 건지요? 아니면, 사서 선생님이 큰 서점에서 골라 오신 건지요?"
"아, 잠시만요" 사서 선생님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키보드 위를 질주한다. "얼마 전에 김땡섭이라는 분이 희망도서로 신청하셨던 책이네요."
선생님의 말씀이 채 끝나기도 전에 도서관 문을 밀고 나서는 우리의 문학소년. 그래도 양심은 좀 남아 있나 보다. 두 귀가 빨개지더니 얼굴마저 발그레 발그레하다.
셀프 "희망도서" 추천이라니.
참으로 뻔뻔한 녀석이로다. 한편으론 좀 귀엽긴 하다.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어도, 초보 작가가 누릴 수 있는 과정 속의 소소한 기쁨도 스스로 찾아 느낄 줄 아는 걸 보니 말이다.
원래는 반듯했는데,
글을 쓰면서부터 점점 뻔뻔해지는 이 녀석.
이 엉뚱 발랄한 녀석.
두 번째 책은 도대체 언제나 쓰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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