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지'
그만 적고 나가도 돼요. 문학 교양수업의 중간고사가 있던 날, 교수 S는 혼자 남아서 답안을 적어내던 내게 다가와 살짝 귀띔을 하고 지나간다.
2008년 복학 후 첫 학기, 대학 2년을 축제처럼 즐기다 군대를 다녀온 이 시기부터 나는 맨 앞줄에 앉기 시작했다. 지난 2년의 대학생활에 대한 후회와, 이제는 학점관리를 해야겠다는 실리가 결합된 행동이었다.
교수 S는 정식 교수는 아니었다. 소위 시간 강사로 불리는, 30대 후반에서 40대로 보이던 그녀는 동그란 뿔테 안경에 수수한 차림으로 강의를 이어 나갔다. 그 당시 수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는 의도로 강의 시간이면 꼭 질문을 했다. 문학 교양수업에서도 이 적극적인 질문 행세는 계속되었다.
그럴 때면 S는 적잖이 당황할 때도 있었다. 그 당시 S가 질문에 자주 했던 말이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였다.
그 당시 나는 그 말이 '무척이나' 무책임해 보였다. 교수라는 사람이 어떻게 자신의 주관 없이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고 얘기하는 걸까.
그 말을 할 때의 S 표정이 16년이 지난 지금도 떠오른다. 흔들리는 눈빛, 자신 없는 목소리. 자신감과 확신에 차있어 보이는 설익은 질문을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그 당시 그녀는 잘 몰랐으리라...
시험 시간 30분도 안돼 스무 명 남짓한 수강생들은 모두 나갔다. 남아있는 건 S와 나 둘 뿐. 평소 수업시간에는 날카로운 척하며 질문을 해대던 학생이 시험시간에는 학점을 잘 받겠다며 오랜 시간 남아 답안지를 작성하는 모습을 보며 무슨 감정을 느꼈던 걸까. 시험 종료 시간이 되지도 않았는데 그만 적고 나가도 된다고.
문득 S가 떠오른 건 왜일까.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어요'라는 16년 전 무책임하게만 들렸던 그 문장이 오히려 현실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문장으로 들리기 시작했기 때문이 아닐까.
인생에 대해서 확신을 갖고 있다는 사람들의 얘기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 어제의 내 생각과 오늘의 내 생각도 다른데 어떻게 확정적으로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완전한 '나'를 인식하고, 그 모습 그대로 긍정할 수 있을 때 삶을 좀 더 의미 있게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나의 결핍을 안고서 그것을 너무 미워하지도, 너무 가여워하지도 않고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 슬프면 슬프다는 것을 알고 화가 나면 화가 난다는 것을 알고 사랑하면 사랑한다는 것을 알면서 나를 계속 지켜보는 일, 나는 지금 그런 일을 하는 중인 것 같다."
-최은영, 작가의 말 중에서-
무엇이든 배울 때 우린 '기본기'를 얘기한다. 기본을 잘 배워놓아야 응용이 쉽다고. 과연 인생의 '기본기'란 무엇일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먹고 살 정도로 일의 기본기를 채우기 위해 지금껏 노력해 왔다. 기획, 보고서, 프레젠테이션 등등. 근데 일이 익숙해지고 나름 잘(?) 한다고 생각할수록 상대의 말을 잘 안 듣고, 내 말이 맞단 아집이 점점 커지게 된다.
내 말이 먹힐 땐(?) 만족감을 얻다가 조금이라도 상황이 틀어지면 상대에 대한 서운함과 실망감이 몰려온다.
결국 인생의 기본기란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는 열려있는 마음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