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응 안 된다
요즘 동료들과 사석에서 이야기를 할 때 부쩍 많이 쓰는 단어가 있다. 바로 '꼰대'라는 말이다. 올해 우리 부서의 조직 변화는 휘몰아치는 태풍과 같았다. 한 해 동안 무려 삼분의 일의 조직 구성원들이 퇴사하고, 그 자리를 새로운 사람들이 채웠다. 팀원뿐 아니라 팀장과 부서장급의 리더십 교체도 있었다. 모든 구성원들의 변화는 어떤 방식으로든 조직에 영향을 미치는데, 그중에서도 리더십의 변화는 더 큰 파장을 불러일으킨다. 특히나 부서장이 어떤 스타일이냐에 따라 조직 전체의 방향성과 조직 문화가 크게 바뀌곤 한다. 반년 전 우리 조직에 새로 부임한 부서장과, 지난달 입사한 총괄팀장은, 큰 분류에서 '꼰대'라 정의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기존 조직 문화의 유일한 장점이 아마도 평등한 관계와 자유로운 분위기였던 것 같은데, 이 둘이 들어오고 나서 갑자기 조직의 공기가 달라지는 것을 확 느낀다. 마치 '꼰대 체험'이랄까.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상황들에 당황해, 자꾸만 '꼰대'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게 된다.
퇴근을 앞둔 오후 5시, 부서장이 보낸 메시지가 사내 메신저 알람에 뜬다.
"오늘 6시부터 다들 회의 가능하시죠?"
하루 앞으로 다가온 워크숍 발표자료 리허설을 위해 갑자기 팀장 미팅을 소집했다. 곧이어 옆팀 팀장이 다가와 '저녁 도시락'을 주문하려고 하는데, 먹고 갈 건지 물어본다. 도시락까지 시키는 걸 보니 집에 일찍 가기는 글러 보인다. 여기서 용감하게 '저는 저녁 약속이 있어서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라고 말하는 팀장도 있다. 다들 그를 향해 부러움이 섞인 눈빛을 보내지만, 회의를 빠지자니 부서장의 눈치가 더 보인다. 어쩔 수 없이 회의실로 향했다. 내일 발표할 팀장들이 발표 자료를 열어 간단하게 설명을 했고, 부서장은 한 장 한 장, 한 글자 한 글자를 살피며 코멘트를 했다. 그래프가 잘못되었다느니, 발표 내용이 부실하다느니, 저 장표는 아예 없애고 다른 자료를 만들어야겠다는 등의 피드백이었다. 당장 내일 아침 9시부터 발표를 시작하는데, 오늘밤 안에 저걸 다 반영해 수정해야 하는 담당자들의 얼굴은 점점 잿빛이 되어갔다.
부서장은 오늘 급작스런 미팅에 참석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괜찮다고 말하면서도, 그들을 향해서도 일을 시켰다. 도대체 참석하지 않았지만 어떻게 알고 일을 하라는지 잘 이해가 되지는 않았지만, 일단 다들 앉아서 듣고 있었다. 벌써 저녁 8시였고, 부서장의 말에 토를 달았다가는 오늘밤 안에 집에 가기는 글렀기 때문이었다.
"A팀장님, 이거 내일까지 가능하죠?"
말투는 권유형이나, 지시임에 분명한 문장이다. 앞뒤 맥락을 알려주지도 않고, 자신이 필요한 사항만 지시한다. 내가 아는 A팀장은 저런 지시를 받으면 입에 거품을 물고 항의하는 스타일이다. 그러나 꼰대 부서장 앞에서는 순한 양이 되어 그냥 '네'라는 한마디만 한다. 그러고 나서 나에게 다가와 다시 '그런데 부서장이 도대체 나보고 뭐 하라고 한 거냐? 왜 나한테 이걸 시키냐?'라고 하소연을 한다. 들어줄 사람 없는 문장은 허공에 흩어질 따름이고, 그에게는 부서장이 지시한 일이 고스란히 남는다.
"B팀장님, 잠깐 제 방에서 보실래요?
오전 8시에 B팀장에게 메신저를 보낸다. 아직 출근 중인 B팀장은 쩔쩔매며 10분 안에 가겠다고 답한다. 그전 같으면 상상하지도 못할 풍경이다. 아마도 이전 부서장에게는 이렇게 말했겠지.
"지금이 몇 시인 줄 아세요? 이 시간에 보자고 하시는 건 너무하신 거 같습니다"
그러나 이런 말은 속으로 삼킨다. 꼰대 부서장에게 말해봤자 나만 찍히고 끝나는 게임이 눈에 훤하기 때문이다. 제발 이 일을 하는 배경을 알려주고 일을 시키면 좋겠다, 너무 많은 일을 한꺼번에 안 시키셨으면 좋겠다 건의한 팀장들도 있었지만, 결말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부서장에 의해 '판단'되고 분류되어, 부서장과 멀어지게 될 뿐이었다.
새로 온 총괄팀장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팀원들이 혹여 외근 때문에 바빠서 지시하신 업무를 이때까지 못하겠다고 하면, 당연히 해야 될 걸 왜 못하겠다고 하냐고 반문했다. 오늘 오후 4시에 메일을 보내고 내일 오전 9시까지 주요 자료를 요청하는 식의 업무는 이어졌다. 신기한 건, 팀원들로부터 볼멘소리가 나올 법도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밤을 새워서라도 오전 9시까지 자료를 제깍제깍 제출하는 그들의 달라진 행동이었다. 그가 아무리 미친 소리를 하더라도, 누구 하나 뭐라고 하지 못했다.
이전 부서장이 있을 때는, 이제 막 창업해서 자유롭고 개방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스타트업 느낌이 났다면,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예스'를 말하는 복종 문화가 자리 잡은 느낌이었다. 우리 회사는 외국계 회사라 심하게 하지는 못해도, 점점 군대의 향기가 난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남자들끼리 다 같이 우르르 몰려가 담배를 피우고 오면, 주요 의사결정이 바뀌어 있었고, 이에 동참하지 않았던 다른 팀장들은 그 결과에 의아해했다.
조직 내에서 힘의 논리가 점점 커져갔다. 브런치 작가님 그로플 백종화 님의 '리더와 보스'라는 글에서 본 내용인데, 보스는 사람을 장악하고, 예스에 선호하고, 내 편을 만든다고 한다. 마치 비상 계엄령을 선포한 대통령이 군사력을 동원해 한국을 장악하듯이, 조직에서도 힘의 논리로 누군가 장악하려고 들면 무서워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꼰대와 보스의 공통점이 바로 내 말에 복종하게 하고, 내가 하는 말에 반기를 드는 것을 못 참는 것 아닐까. 생계를 위해 직장을 다녀야 한 하는 회사원들은, 이런 보스를 만나면 어쩔 수 없이 보스에 말에 따를 수밖에 없다. 이직이나 퇴사를 하지 않는 이상 말이다. 상명하복의 문화에서 어떻게든 적응하기 위해서는, 내가 싫어도 생존을 위해 '네'라고 대답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조직의 지속가능성 여부를 생각하자면, 이게 과연 맞는 방향성일까 싶다. 아마도 꼰대 보스들은 자신이 군대식이라고 느끼지 않을 것이다. 상냥하게 부탁했고, 자신도 부하 직원들이 마음에 안 들지만 많이 참았고, 위에서 하라는 대로 하는 게 뭐가 문제냐 답하겠지. 과연 이들이 진심으로 팀원들을 생각해 본 적은 있을까. 그들의 성장과 개발을 위해 어떤 것을 해줄 것일지 고민이나 해봤을까.
얼마 있으면 이 부서를 떠날 사람이지만, 오랫동안 애정을 가진 조직에 대해 걱정되는 마음에 이렇게 익명의 글로나마 하소연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