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에게도 필요한 실패와 성장의 기록
실혹시 KAIST의 '실패연구소'라는 곳을 아시는지?
우리나라에서 똑똑하기로 유명한 학생들이 모여 있는 이 곳에는, 이름도 독특한 '실패연구소'가 있다. 국내에서 최초로, 실패를 주제로 2021년에 설립된 곳이다. 생각보다 많은 학생들이 성과와 성공에 대한 압박 속에서 지치고, 실패라는 단어 앞에서 크게 위축된다는 고민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연구소는 학생들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시도를 이어갈 수 있도록 돕기 위해 만들어졌다. 실패를 숨기기보다, 그 경험을 귀하게 여기고 분석해 서로에게 나누려는 취지다.
아이러니하게도 실패연구소 역시, 좋은 의도와는 다르게 많은 실패를 겪었다고 한다.
학생들의 호응은 없었고, '실패주간'이라는 행사를 기획했지만 처음부터 잘 되었던 건 아니라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실패의 경험을 토대로, 지금은 KAIST에서 실패를 나누는 것이 하나의 긍정적인 문화로 자리잡고 있는 것 같다. 연구소 직원들은 더 많은 참여와 반응을 이끌어내기 위해 다양한 기획을 했는데, 망한과제 자랑대회, 실패 사진 공모전, 실패 전시회 등이 있다.
이 중에서도 직장인인 내 귀에 팍 꽂힌 것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실패 이력서'였다. 이력서라 함은, 무릇 내가 직접 만든 성과가 아닌것도 마치 내가 다 한것처럼 쓰는, 포장 기술이 필요한 서류 아니던가. 그런데 실패의 경험을 이력서로 써보라니, 참 신선했다. 아프고 쓰라리기만 한 실패가, 한 장의 이력서가 될 수 있다니. 그래서 브런치의 지면을 빌려,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실패들을 작은 기록으로 꺼내보고자 한다.
[실패 이력서]
1. 대학원 (쓰디쓴 첫 인생 바닥을 보았다)
- 실패 결과 : 연구 성과나 논문은 당연히 없었고, 졸업도 어려울 수 있다는 얘기를 들음.
- 실패 원인 : 취업하기 싫어 대학원으로 도피함. 돌이켜보니 연구에 대한 의지도, 주체성도 없었음.
- 실패에서 배운 점 : 막상 해보니 연구가 내 적성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음. 내가 하고 싶은 다른 것들을 찾아야겠다는 결심.
2. 외국계 회사 입사 (입사만 하면 끝인 줄 알았지)
- 실패 결과 : 전 직장보다 직무 역할, 조직문화, 성장 가능성 등이 훨씬 낮은 곳으로 입사했음.
- 실패 원인 : 외국계 회사라는 명함만 보고 들어갔던 점. 백수를 빨리 탈출하기 위해 섣부른 결정을 했음.
- 실패에서 배운 점 : 회사 자체에 대한 환상 대신, 내가 그 회사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고 커리어 성장을 할 수 있는지를 더 중요하게 봐야겠다는 교훈을 얻음.
3. 아시아 지역 담당자 역할 (나만 못하는 것 같더라)
- 실패 결과 : 입사 한 달만에, 매니저한테 그만두겠다고 함. 결과적으로는 일 년만에 엉엉 울며 사표냄.
- 실패 원인 : 이번에는 회사에 대한 환상 말고, '역할'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그 역할에 지원했음. 막상 내가 해보니 그 역할에 한참 부족한 사람이라는 자괴감이 들었는데, 그 마음을 극복하기 어려웠음.
- 실패에서 배운 점 : 나를 스스로 돌보는 것이 먼저일 수 있겠다는 생각. 넘치는 자신감으로 지원했지만, 종국에는 내가 가장 못난 사람이라 스스로 비난하다 퇴사했음. 셀프 치유와 회복의 시간이 필요하고, 스스로 공격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함.
쓰다 보니, 실패 이력서에 추가할 내용이 자꾸만 떠오른다.
미숙했던 매니저로서 팀원과 싸우고 한동안 등을 돌렸던 경험, 고객 응대를 제대로 못해 회사 대표메일로 항의를 받았던 기억 등등. 실패를 겪을 때마다 너무 괴로워, 끙끙 앓으며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밥도 못 먹었더랬다. 하지만 지나고 나니, 그 때 실패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내가 없었겠다라는 생각이 든다.
위의 실패 이력서 제목만 본다면, 나는 대학원도 진학하고, 외국계 회사에 입사했으며, 아시아 매니저도 해본 화려한 경력을 가진 사람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넘어지고 깨지면서 아파한 과정의 세월이 녹여져 있다. 남들 눈에는 안 보일지라도, 이런 실패의 경험은 내 몸과 마음에 각인되어, 내 자산이 되었을 것이다. 그 자산 덕에, 조금 더 겸손해지고 더 배우려 노력하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 생겼으리라.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실패를 자랑할 수 있는 사람들은, 지금 성공한 사람들 아니냐고. '이렇게 실패했지만, 짠! 지금은 내가 성공했어요~'라고 말할 수 있는 소수의 부류 아니냐고 말이다. 그러나 실패의 가치에 대해 설파하는 많은 전문가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얘기한다. 실패 경험 후에 좌절하고 주저 앉은 사람과, 힘들더라도 그 실패를 딛고 일어난 사람의 차이가 있다고. 만약 스티브 잡스가 애플에서 해고 당하고 나서 집에서 칩거 생활만 했다면? 아마도 지금의 아이폰은 없었겠지.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는 지금의 위대한 기술은, 99%의 실패와 1%의 성공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실리콘 밸리에서도, 구글에서도, 스탠포드 대학교에서도,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계속 도전할 수 있도록 장려한다고 한다.
이 글을 읽고 계신 직장인 여러분도, 실패 이력서를 써보시면 좋겠다.
실패 이력서는, 마치 학창 시절 오답 노트와 닮았다. 틀린 문제를 다시 풀어보며, 다음 시험에서는 안 틀리도록 복습하는 것과 같다. 차근차근 적다 보면, 나에 대해 조금 더 이해하게 되리라. 앞으로 어떤 길을, 어떻게 가보면 좋겠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실패 이력은 곧 시도의 여정이다. 그 안에 숨겨진 여러분의 용기와 성장의 기록을 한번 들여다보시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