넓고도 독립적인 서점들

연휴 끝의 결심

by 알렉

장마 같은 소나기와 책방주인의 아침

10월의 첫 주와 추석 연휴 기간 내내 비가 내렸다.

때 아닌 우기처럼 쏟아진 비에 날씨는 한층 쌀쌀했다.

일기예보에서는 “지속적인 소나기”가 내릴 거라고 했는데,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었다.

소나기는 ‘갑자기 세차게 쏟아지다가 곧 그치는 비’다.

잠깐 왔다가 그쳐야 소나기인데 “지속적인 소나기”라니, 그 모순된 표현에 괜히 트집을 잡으며 혼자 부아를 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10월 8일 아침, 연휴 마지막 날의 하늘은 거짓말처럼 맑고 청명했다.

마치 4일간 장마처럼 내리던 소나기가 거짓말이었다는 듯, 청명한 가을 햇살이 책방 창가로 쏟아졌다.

책방 주인인 나는 예정대로 오전 독서 모임을 열었다.

연휴 중임에도 몇 명이 찾아왔고, 책방주인의 숙명처럼 나는 오는 손님들을 반갑게 맞이하며 문을 열었다.

비구름 걷힌 하늘 아래서 함께 책을 읽는 시간이 어쩐지 더욱 소중했다.

폭우 뒤 드러난 파란 하늘은, 독서하는 사람들에게 내린 작은 축복 같았다.


숙명과 자신감에 대하여

며칠 전, 책방 일을 계기로 블루도어북스 대표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문득 내가 물었다.

“대표님, 도하서림에서 블루도어북스로 왜 옮기시기로 결정하셨어요?”

잠시 생각하던 그분은 담담히 대답했다.

“그냥 옮겨야 할 것 같았어요. 그리고 좀 자신감이 생겼어요.”

순간 가슴 한켠이 울렸다.

숙명처럼 다가오는 어떤 결정,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자신감(혹은 실력)에 대한 이야기였다.

나는 곱씹었다.

블루도어북스 대표님처럼 ‘옮겨야 하는’ 숙명 같은 무언가를 나도 가지고 있을까?

어디를 가도 자신 있다고 말할 만한 결심과 실력이 내게도 있는 것일까?

그 질문들이 가을볕처럼 맑게 마음속에 스며들었다.

사실 나는 본업이 따로 있고, 부업으로 심야 책방을 운영한다.

밤 시간대에만 문을 여는 작은 책방지기이지만, 낮에도 책방 문을 활짝 여는 분들을 한없이 존경한다.

만약 언젠가 내가 심야가 아닌 주간까지 포함해 책방을 본업으로 삼아 제대로 운영해본다면,

꼭 세상에 증명하고 싶은 두 가지 목표가 있다.

서점도 충분히 돈을 벌 수 있다는 것.

서점 직원에게도 대기업 직원 못지않은 복지와 혜택을 줄 수 있다는 것.

이 두 가지는 내 근래 바람이다.


독립서점은 가난해야 하고 그저 인내로 버텨야 한다는 자조 섞인 통념을 나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또 “동네 서점은 공간도 작고 마진 구조가 제한적이다”라는 패배감 어린 소리도 믿고 싶지 않다.

왜 책을 파는 사람들이 반드시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가?

왜 좋아하는 책과 함께하는 삶이 곧 경제적 희생을 의미해야 하는가?

작은 서점일지라도 꿈으로 통하는 통로가 될 수 있음을, 나는 보여주고 싶다.


넓고도 독립적인 서점들 – 출장길 미국과 일본의 사례

그러나 현실을 돌아보면, 한국에서는 독립서점이라 하면 대개 자그마한 개인 서점을 떠올리지만 해외에서는 그 정의와 모습이 사뭇 다르다.

미국의 경우 독립서점은 말 그대로 거대 자본의 체인에 속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운영되는 서점을 뜻한다.

그 크기나 수익 규모가 꼭 작다는 뜻은 아니다.

실제로 미국에는 지역 공동체의 지지를 받으며 대형 서점 못지않게 성장한 독립서점들이 여럿 있다.

예를 들어 오리건주 포틀랜드의 파월스 북스(Powell’s Books)는 세계 최대 규모의 독립서점으로,

한 도시 블록을 가득 채운 매장 면적이 6,300㎡에 달하며 책 재고만 약 백만 권을 자랑한다.


1971년 가족 경영으로 시작해 지금까지 가족이 소유하고 운영하는 이 거대한 서점은 여전히 체인에 속하지 않은 진정한 독립 서점이다.

파월스는 신규 서적과 헌책을 한곳에 모아 판매하는 독특한 모델로 성장했고,

지역 작가 지원과 수백 회의 저자 사인회·낭독회 등의 이벤트를 열며 지역 문화의 중심지로 사랑받고 있다f. 한마디로 “규모는 크지만 영혼은 indie”인 셈이다.


뉴욕 맨해튼의 스트랜드 서점(Strand Book Store) 역시 대표적인 독립서점이다.

1927년 문을 연 이래 창립 가족이 90년 넘게 운영해온 이 서점은 “18마일에 달하는 서가”라는 슬로건처럼, 4층 건물에 신간부터 중고서적까지 약 250만 권을 구비하고 있다.

뉴욕의 보물이라 불리는 스트랜드 서점은 현재 230명 이상의 직원을 거느린 가족 경영 기업이자, 뉴욕시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독립서점의 상징이다.


직원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해 35년 넘게 유지해올 정도로, 스트랜드는 독립서점이면서도 안정적인 일자리를 제공하는 프로페셔널한 경영을 보여준다.

독립서점 직원도 대기업 못지않은 복지를 누릴 수 있다는 내 꿈을,

스트랜드는 이미 현실로 증명하는 듯하다.

한편 독립서점이 반드시 대형 서점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건 독립적인 컨셉과 수익 구조를 갖추고 자생력을 키웠다는 점이다.

2020년 미국에서 조지 플로이드 사건 이후 흑인 소유의 독립서점을 지원하는 움직임이 퍼지면서,

시카고의 한 작은 동네 서점은 일시적으로 주문이 폭주해 주당 3천 권 팔리던 책이 5만 권씩 팔리는 기염을 토했다.

그 서점(세미콜론 북스토어)의 주인은 “너무 주문이 밀려와 전화를 받지 못할 정도”라며 기쁜 비명을 질러야 했다.

온라인 서점(Bookshop.org)과 지역 커뮤니티의 연대로 인해 불과 몇 주 만에 200만 달러 가까운 매출을 올린 사례로 기록되기도 했다.

이처럼 독립서점이라고 해서 돈을 못 버는 건 결코 아니라는 것이 해외 사례에서 드러난다.

중요한 것은 고유한 색깔과 공동체의 지지, 그리고 기민한 비즈니스 감각이다.


미국 포틀랜드의 파월스 시티 오브 북스 서점 내부.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을 수 있는 휴게 공간까지 갖춘 복합 문화 공간으로 운영된다.

일본에서도 ‘독립서점’이라는 말이 한국처럼 “작은 동네책방”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거대 체인 서점과 다른 결을 가진, 독립적인 시장과 수익 구조를 구축한 서점들을 가리키는 용어로 쓰인다.


규모 면에서도 100평, 200평 넘는 대형 서점이면서도 자신만의 콘텐츠와 운영 철학을 지닌 곳들이 여럿 있다.

게다가 일본의 서점들은 수익 구조 면에서 무척 다채로운 시도를 보여준다.

가령 도쿄 롯폰기에는 아예 입장료를 받는 서점이 있다.

‘분키츠(文喫)’라는 이 서점은 “책과 우연히 만나는 공간”을 표방하며, 하루 이용료 1,500엔을 내면 서점 안에서 무료로 커피와 차를 마시고, 업무 미팅을 하거나 식사까지 할 수 있다


. 3만여 권의 책이 있는 이곳은 서점이라기보다 하루 종일 머무를 수 있는 복합 문화 살롱에 가깝다.


책 판매만으로 수익을 내기 어려운 현실에 착안하여 “공간 경험” 자체에 값을 매긴 혁신적인 사례다.


또 다른 예로, 도쿄의 B&B(Book & Beer) 서점은 책과 맥주를 결합한 이색적인 독립서점이다.

번화한 시모키타자와에 위치한 이 작은 2층 책방에는 바(bar)가 함께 있어서 독자들이 책을 고르며 시원한 생맥주를 한 잔 즐길 수 있다.


이름 그대로 ‘Book & Beer’, 책과 맥주를 파는 서점인 셈이다.

이곳에서는 매주 작가 강연이나 북토크 등의 행사가 열려, 저녁이면 동네 문인들과 독자들이 자유롭게 어우러지는 문화 공간이 된다.

책 판매뿐 아니라 주류 판매와 유료 이벤트 등 다각화된 수익 모델로 운영되는 사례다.

그밖에도 일본의 독립서점들은 잡화와 문구, 음반을 함께 파는가 하면, 카페와 서점을 융합하여 책 읽는 카페로 성공한 곳들도 많다.

독립서점이라 해서 반드시 영세하게 굴지 않고,

“책방+α”의 창의적인 비즈니스로 충분히 성과를 내고 있음을 보여준다.


작은 서점들의 현실과 내일

물론 한국에도 희망의 움직임은 있다.

2022년 기준 국내에 800곳이 넘는 독립서점이 영업 중이며, 해마다 각자의 개성으로 독자를 만나고 있다. 숫자만 보면 미국(약 2,000여 곳)과 비교해도 결코 적지 않은 규모다.

다만 안타깝게도 많은 국내 독립서점의 사장님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고민은 하나다.

“어떻게 생존할 것인가?” 서점 운영만으로 생활이 어려우니 낮에는 다른 일을 하거나,

온라인 판매나 굿즈 제작 등 부가 수익을 찾아 나서는 분들도 계시다.

“동네 서점은 작고 마진이 박하다”는 통념이 만들어낸 현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앞서 살펴본 해외 독립서점들의 사례가 우리의 내일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독립서점이 꼭 작아야 할 이유도, 가난해야 할 운명도 없다.

한국의 동네책방들도 각자만의 방법으로 변화를 모색 중이다.

어떤 곳은 자체 제작 상품이나 굿즈 판매로 수익을 올리고,

또 어떤 곳은 책과 맥주 와인, 책과 디저트를 접목해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지역 출판사와 협업해 동네 특화 서점을 연다든지,

독서 모임과 글쓰기 강좌를 열어 지역 커뮤니티의 사랑방이 되는 책방도 늘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결국 독자가 얼마나 좋은 시간을 보냈는가를 중시하는 방향으로 서점의 역할을 재정의하는 과정일 것이다.

독립서점이 단순히 책을 파는 공간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문화 플랫폼으로 자리매김할 때 생존의 문제도 자연스레 풀리지 않을까 생각한다.


맺으며 – 꿈으로 통하는 문을 열며

비가 그치고 맑게 개인 하늘처럼, 내 마음속에도 한 줄기 희망이 비친다.

“서점도 돈을 벌 수 있고, 서점 직원도 행복할 수 있다”는 그 믿음을 현실로 증명하는 것이 나의 목표다.

언젠가 내게도 책방 주인의 숙명이 온전히 찾아온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그 문을 열 것이다.

블루도어북스 대표님이 그랬듯 자신감을 갖고 한 발 앞으로 내딛을 것이다.

작은 서점이지만 그 안에 커다란 세상을 담아내고,

비 오는 날 우산 없이도 찾고 싶은 따뜻한 피난처 같은 공간으로 키워보고 싶다.

“소나기 종일 오나” 하는 옛말이 있다.

아무리 퍼붓는 소나기도 종일 내릴 수 없듯,

우리 독립서점들을 둘러싼 어려움의 장마도 언젠가 끝나리라 믿는다.

비 온 뒤 맑게 개인 하늘 아래, 책방지기는 다시 문을 열고 독자를 맞이한다.

그 문을 통과한 사람들은 저마다의 꿈과 이야기를 한 아름 안고서, 또 하루를 살아갈 힘을 얻는다.

오늘도 나는 조용히 다짐해본다.

이 작은 책방 문이 결국 꿈으로 통하는 통로가 되기를.


추신: 다음 글에 기회가 된다면 실제 해외 독립서점들의 활동상을 8가지 유형으로 정리한 내용을 올려보려고 합니다.


심야서점&독서모임: https://www.instagram.com/_mableco/

소모임:https://www.somoim.co.kr/5d02162e-4f44-11ef-838d-0a865d8d22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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