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을 주지 않으면 글을 쓰지 않는다. 이게 원래 내 철칙이었다. 나에게 글쓰기는 너무 노동이라, 자신을 위해 하는 일까지 노동이 되는 게 싫었다. 나를 위한 일이라면 적어도 애쓰지 않아야 하고, 불편하지 않아야 하고, 재미 위주로 흘러갈 수 있어야지. 글 쓰는 건 재밌을 때도 많지만 동시에 고된 일이잖아. 마냥 마음 편히 할 수 없으니 쉴 때도 나를 괴로움으로 밀어 넣진 말자. 남을 위한 기록엔 열심이었지만, 나를 위한 기록은 미뤄온 셈이다.
5월에 독서 모임을 하면서 만난 사람들을 기록가 같았다. 남을 위한 글도, 나를 위한 글도 모두 잘 쓰는 사람들. 기록은 계획과도 연이 깊다. 뭔가를 이루고 싶은 사람은 결국 쓴다. 목표에 다다르려면 그저 열렬한 마음으로는 부족하다. 목표와 관련된 것만 감지하는 레이더로 온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고, 자신을 돌아보면서 부족한 부분을 인정하고 견해를 바꾸는 언짢음을 감수해야 한다. 기록을 잘하는 사람은 씀으로써 열정과 실행을 구분하고, 할 수 있는 것들과 할 수 없는 것들을 솎아내는 것에 능한 사람이다.
목표를 향한 맹렬함에 더해, 나를 냉정하게 돌아볼 수 있는 균형감각. 성찰하는 고달픔을 이겨내고서라도 자신을 똑바로 마주하는 용기. 몇 년 치의 기록을 차곡차곡 모아오면서 자신과 싸웠을 그 담대한 시간이 단단해 보였다.
반면 나는 뜨거운 마음은 있었지만, 목표를 구체적으로 실행시킬 차가운 이성은 부족했다. 하고 싶은 게 생기면 쉴 새 없이 생각하는 타입이기에 20대는 그렇게 버텼다. (물론 엄청난 목표를 세우지 않아서 그런 듯^^) 누구를 만나고, 무엇을 진행하고, 어떻게 문제에 접근하고, 어느 정도의 노력을 투입할 것인지 끊임없이 생각하다 보면 결국 하게 되니까.
30대에는 한계에 다다른 것 같다. 올해 초에도 ‘다양한 사람을 만나야지’, ‘새로운 운동에 도전해야지’, ‘얼마짜리 계약을 성사시켜야지’ 이런 큰 그림만 생각하고 그걸 실행시킬 세세한 계획은 순간순간 딥 다이브한 고민으로 끝냈다. 어찌저찌해 냈지만 머리 속이 늘 생각으로 가득 차서 잘 비워지지 않았다. 시작과 끝맺음이 다소 충동적일 때도 많았다.
‘어떻게든 하겠지’라고 생각하며 일 벌이면 벌이는 대로 쫓아가는, 미래의 나에게 중요한 결정을 미루는 태도로 일관했다. 삶을 잘 정리하지 않은 것이 어떻게 보면 나에게 배려가 없었던 게 아닌가. 달려 나가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았나.
하반기부터는 기록을 좀 더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실행 자체에 의의를 두는 것도 좋지만, 그 과정의 밀도를 높이는 건 내 몫이니까. 목표는 목표대로 배짱으로 밀고 나가고, 경험은 더 풍부해질 수 있도록 행복할 거리를 자주 발견하고.
좋았던 지점은 단물 쏙 빠질 때까지 곱씹고, 부족했던 점은 수치스러워도 똑바로 마주하고. 기록으로 그런 걸 해내는 단단한 사람이 되고 싶다. 어제의 나, 한 달 전의 나, 1년 전의 나를 돌아봤을 때 어떤 길을 택한 사람이었는지 분명히 알 수 있게. 그래서 내 선택에 후회가 없고 스스로 당당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