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yeongrim Amy Kang Feb 13. 2023

내 “원” 안의 사람들과 여행, 그리고 관찰

2023.02.13

2월 10일 한국.


정확히 우리 영국아파트에서 나온 지 24시간 만에 한국 제주도에 떨어졌다. 그리고 나를 데리러 렌터카를 끌고 나와준 동생의 얼굴을 시작으로, 엄마의 얼굴, 어색해하는 대니의 얼굴 그리고, 엄청 힘들지만, 모든 이의 얼굴을 보며, 인사를 나눈 어딘가 정겨움 가득한 나의 얼굴까지. 그런 얼굴들로 가득히 나의 한국 방문 및 휴가의 막이 열렸다.




허리가 뻐근하고 엉덩이뼈가 주저앉는듯한 그런 통증을 느꼈지만, 왠지 모르게 여유롭고, 한가하게 흘러가는 제주도의 거리와, 엄마의 은퇴의 시작을 알린 신식 제주도 아파트는 나의 모든 짜증과 피곤을 가볍게 넘길 수 있게 해 주었다.


이번 제주도 여행을 시작으로 하는 한국에서의 긴 휴가의 목적은 한국 여행도 아니요, 쇼핑 및 먹거리 탐방도 아닌, 결혼한 커플로서, 일종의 사위가 장모의 집에 찾아가 인사를 드리는 “결혼 후 처음 찾아뵙기”였다. 애초에 주목적은 딱 하나, 엄마를 찾아뵙고, 대니와 함께 지내며 엄마랑 더 가까워지고, 한국음식도 먹으면서 더 서로를 알아가는 것이었다. 쉬웠다.


만약, 둘이 한국에 처음 가보는 것이고 (커플로서) 내가 한국인으로서 한국을 잘 아는 사람으로서, 한국의 주요 관광지를 돌아다니고 소개하고, 가이드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면, 이번 여행은 첫 판부터 개판이었을 것이다. 정말 다행이다. 그래서 어깨의 짐을 한 운 큼 덜어내었다.


대니에게 지속적으로 이번 여행의 주목적은 하나라고, 내 귀로 백번을 들어도, 어찌 된 영문인지 뭔가 모를 이 불안감은 가시질 않았다. 그리고 상담선생님께 불안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항상 사람과 관련된, “인간” 관계에 대한 모든 것은 나를 불안하게 하고, 좌불안석의 상태로 만든다고 말했다. 도저히 나이 30이 넘도록 이놈의 인간에 대한 어쩌면 영문모를, 어쩌면 모호한 이 불안함의 기분은 언제쯤 가시는 것이냐며 선생님께 한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징징거렸다. 어떻게 안 되겠냐며, 내가 안되더라도 선생님께서 어떻게 해주시면 안 되겠냐며….


결국은 내가 해나가야 하는 것을 앎에도 나는 그렇게 내 수학숙제 해결해 달라고 선생님께 가서 징징대는 아이처럼 귀찮게 굴었다.


그리고 그런 나에게, 선생님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나에게, 나를 둘러싸고 있는 원,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나의 사람들에 대해서 그려놓은 그림을 다시 보여주시며, 다시 나의 나의 “원” 안쪽의 사람들의 이름을 상기시켜 주셨다.


체 20명도 안 되는 내 원의 사람들, 그들의 이름, 그리고 내가 중심이 된 작은 나의 원밖으로 퍼져있는 또 다른 원형들. 이 이름들이 나이가 들면 바뀔까? 아니면 원형이 더 넓어질까? 이름이 더 많아질까 적어질까? 등등을 예상하다 어릴 적 기억이 떠올랐다.


다른 어릴 적의 기억만큼이나, 그다지 좋지 않은 기억인데도, 내 뇌는 이 기억을 놓을 줄을 몰랐다.


한창 머리에 피가 말라가고, 중학교가 되어 선생님들이 장래희망을 진지하게 적어내라며 재촉할 시절. 나는 변호사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성적도 상위권에 등수도 나쁘지 않고, 항상 상위 성적을 무조건으로 요구하던 부모님의 입김 탓도 있었다. 공부를 잘해야 머리가 좋아야지만 가능한 변호사, 그중에서도 인권변호사가 되겠다고, ”그날“을 보면서 생각했다. 그리고, 내가 모든 인류를 구원할 수는 없어도, 내손 뻗어 닿는 거리의 모든 사람들은 도울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꿈을 가지게 되었다. 항상 변호사시험을 준비하고, 공부하던 아버지에게 점수를 따고 싶은 마음도 내심 있었다.


그리고 그 꿈은 덤덤하면서도, 비아냥 거리는 말투의 목소리로 나를 짓밟은 나의 아버지라는 사람에 의해 소멸되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 사람은 그 많은 시간과 돈, 에너지를 들여, 인권변호사나 할바에야 무슨 변호사냐며, 집요하게 나를 파고들었다. 범죄인들 편들어 그들의 인권이 인권의 그 이상의 것인 것처럼 말하며 돈을 버는 그런 법조인보다, 인권변호사가 사람을 돕는데 훨씬 나은, 도덕적으로 상위층에 속한다고 생각했던 나도 문제가 어느 정도 있었다. 그래도, 막 중학생이 된 자식에게,  욕하며 소리치는 화 가득한 목소리에, 나는 졸아도 단단히 쫄았다. 이 이상, 더 이상 말대꾸를 했다가는, 이제는 손이 날아올 것을 알았고, 그 손을 언제든지 뒤에서 튀어나와 몸으로 막을 준비가 되어있는 엄마가 있다는 것을 나는 짐작했다. 그리고 나는 입을 다물고, 내 머리에서 변호사를 삭제했다.


공포가 눈앞에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다 그 아무리, 내속에서 빛나는 꿈이었어도.


그렇게 나는 꿈을 포기하고, 하고 싶은 것을 포기하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포기하고, 그 무엇보다 사람을 포기했다. 내가 포기하고, 내가 기대하는 그 상상의 기대치에 나를 맞기지 않으려고 부단히 도 노력했다. 조금이라도 기대치에 대응할 것 같은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을 잃을까 전전긍긍, 유리병을 앉고 마라톤을 뛰는 사람처럼 힘들었다. 상처받고, 다시 포기하고 그러기를 30년을 반복했다. 포기하면 나는 지킬 수 있다는 생각으로 그렇게 친구도, 학우도, 남자친구도, 그냥 지인들도 만나고 포기하고 끊고, Burning bridges.


이렇게 죽을 때까지 희망 없이 살려나보다 했다. 그 빛나는 상하이에서, 내속과 머리는 까맣게 마르고 죽어갔다. 여기서 벗어날 수 없을 거라고 이렇게 살다 죽어도, 나란 사람 그냥 경림일 뿐인데 뭐 별다를게 잇으랴, 그냥 존재했다.


어느 날, 14억 인구를 자랑하는 그 아시아의 중간에, 파란 눈과 금빛 머리에 대니가 자꾸 내 눈앞에 비추었다. 항상 사람이 쉽고, 관계가 쉬운, 그런 굉장히 다가가기 쉬운 녀석. 맨날 허구한 날 말도 안 되는 그놈의 커피.. 커피 저기 잘한다는데 한 번가서 마실래? 커피 언제 마셔? 하는 애한테, 저건 또 무슨 아시안 페티시가 있는 양키인 걸까 해, 항상 깠다. 일전에 한국인 여자친구가 있었다길래, 더 기겁하고 멀리했다. 그렇게 멀리했것만, 어느새 옆에 착 달라붙어 자꾸만 보였다. 나처럼 시커먼 아이한테 자구 관심을 가지고 말을 걸고, 어딜 가자고 했다. 그렇게 나는 그 옆에 존재하다, 어느새 그 옆에 같이 있게 되었다. 가족이 되었다.


게다가 지금은, 악센트 때문에 말 한마디 못 알아듣던 대니 부모님께, 당신은 용띠라 성질이 고약하고 고집이 보통고집이 아니라고, 그렇게 장난을 부린다.

인생.. 어떻게 될지 모른다더니, 정말 딱! 맞는 말이다.



내가 그려놓은 원의 선들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나= 점 (중앙원)

 엄마= 그다음 원

동생= 그 다음다음 원

….


이 원들 안으로는 혈연으로 맺은 가족 아니고서야, 누가 들어올까 싶었다. 대니가 비집고 들어 오기 시작했어도, 동생은 몰라도, 내 엄마의 “원” 안으로는 절대 못 들어온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새 나는 이렇게 원을 그리는 게 의미가 있을까 생각한다. 그렇게 희미하게 선이 없어진다.


이렇게 모호하고 애매하고, 희미하게 인간과 연을 맺으면 되는 걸까? 그렇게 쉬운 것이었을까 생각해 본다.

쉬웠을 수도… 내가 엄청 어렵게 만든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또 해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