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적으로 난 자기개발서류의 책을 매우 싫어한다. 일단 본인의 성격이 남들로부터의 과도한 참견과 충고를 혐오하는 스타일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보다 본질적으로 자기개발서라는 장르에 기저하는 오만함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내 처지를 경험해 본 바도 아니면서 마치 다 이해한다는 듯, 다 안다는 듯 '이러저러하면 문제가 해결된다'며 위에서 내려다보며, 마치 자애로운양 충고를 건네는 모습이 친절보다는 교만으로 비추어졌기 때문이다.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젊을 때는 고생을 사서 한다고? 아프면 병원에 가야지 꾹꾹 참으면 결국 곪아서 터져버린다. 고생은 젊은 사람도, 늙은 사람도 하기 싫은 법이다. 아침형 인간이 되면 성공한다고 하고, 어떨 때는 또 새벽형 인간이 되라고도 한다.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고 그만큼 많은 삶의 편린들이 있을지언데 다 같은 충고, 처방을 내리는 것이 얼마나 말도 되지 않는 일인가. 바닷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익사의 공포를 마주한 사람에게 자신이 수영을 어떻게 배웠는가를 알려준들 귀에 들어올 리가 없다. 당장 중요한 것은 구명조끼를 던져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자기개발서를 싫어한다.
하지만 이번에 읽은 허지웅의 [살고 싶다는 농담]은 달랐다. 에세이이기는 하지만, 결국 혈액암이라는 슬럼프를 극복한 수기라는 점에서 이 작품은 광의의 자기개발서라고는 불릴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의 차이는 단순히 장르적 분류의 기계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교만함이 느껴지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혈액암을 진단받고 투병하며 느낀 점을 차분히 써 내려간 책이다. 모든 인간이 그러듯 그 또한 살고 싶었다고 말한다. 허지웅은 평온하게 자신이 느낀 고통을, 그리고 타인들과 소통한 기록을 우리들 앞에 내려놓을 뿐이지, '내가 아파봐서 아는데'를 시전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는 고통의 주관성을 직시하며 자신이 결코 타인의 고통을 온전하게 이해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여러분의 고통에 관해 알고 있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이해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지도 않다. 그건 기만이다. 고통이란 계량화되지 않고 비교할 수 없으며 천명에게 천 가지의 천장과 바닥이 있기 때문이다." - 본문 45쪽
삶이란 그런 것이다. 대다수의 시간 동안 우리는 인생의 바닥과 천장의 중간 어딘가에서 부유하며 시간을 보낸다. 자신이 그 중간 어디쯤 있는가 (바닥에 가까운가 천장에 가까운가)는 잘 가늠되지도 않는다. 마치 중간 정도의 수심에 사는 물고기처럼, 저 위 어딘가에 수면이 있고, 또 저 밑 어딘가에 심해가 있다는 정도만 인식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어디에서 해엄치고 있는지는 보이지 않는다. 오직 자신의 바닥과 천장에만 관심을 가질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태생적으로 타인의 고통으로부터 무지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인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미국의 언론인 수전 손택이 그녀의 저서 [타인의 고통]에서 주창했듯 우리 사회는 다른 가람들의 고통마저 소비의 대상으로 전락시켜버리지 않았는가? 결국 우리가 남의 천장의 공허함과 바닥의 무거움을 온전히 읽어낼 수 없는 것이라면, 무의미한 공감을 시도한들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허지웅 또한 글에서 이해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기만에 가깝다고 하지 않는가? 우리는 각자의 수심에서 발버둥 치며 살아가지만 타인이 어떤 천장과 바닥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현재 어디서 허우적거리고 있는지 결코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는 운명이지 않을까.
생각해 보면 나 또한 그러지 않았던가. 비교적 유복한 집에서 태어나 나름 한다는 공부로 우쭐해 자사고, 유학, 그리고 로스쿨이라는 안정적인 길을 걸었다. 뭐 로스쿨 입시를 한 번 삐끗하긴 했지만 '다시 하면 되지'라는 쿨한 마음으로 재수에 성공했으니 슬럼프라 하기도 뭐하다. 그래서 그때의 나는 오만했다. 타인의 어려움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들의 나약함에 물드는 것과 같았다. 또한 세상 모든 인간들을 '공부'라는 단일한 잣대로 평가하며 그 삶의 편린들이 가진 무수한 사연에는 무지했다. 아마 아직도 내 일부는 그러할 것이다. 그러다 내게도 진짜 슬럼프가 찾아왔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오랫동안 준비한 시험의 실패와 32살의 나이에 한 입대. 그리고 소중했던 사람과의 단절. 넷 중 하나로만 맞아도 정신을 못 차릴 와중에 연타로 두들겨 맞았다. 그리고 난 허우적거리다 깊은 심연으로 가라앉았다.
바닥으로 가라앉으니 그제야 바닥의 풍광이 보이더라. 나아가 바닥에 함께 가라앉은 사람들과 잔해들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그렇다. 우리는 언제나 동전의 양면처럼 고통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구나. 30년을 행복하게 살다 불과 1년이 채 되지 않는 기간동은 심해로 침잠했다. 불행과 고통은 늘 행복의 그림자 속에서 위선의 날을 시퍼렇게 갈아가며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곳에는 참 다양한 군상들이 있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 신체적/정신적인 어려움으로 고통받는 사람, 외로움에 사무친 사람, 운이 함께하지 않아 실패를 겪으며 삶의 겨울을 보내는 사람들. 그 속에 나도 있다. 하지만 결코 함께하는 사람들을 온전하게 이해한다는 방만한 생각을 품지 않으리라. 단지 우리는 이 곳에서 함께 고통받으며 나란히 존재할 뿐이다.
하지만 함께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얻는 것이 많다. 타인을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은 결국 차이에 눈뜬다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것에 동의하지는 못하지만 서로 달리 생각함에는 동의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정치적 성향이, 종교가, 감정의 포인트들도 서로 다르다. 하지만 서로 다른 존재임은 이해할 수 있으며, 그런 이해들로부터 '그럴 수 있지'라며 예전에는 싸웠을 문제들에 대하여 쿨하게 넘기고 차라리 스스로에게 집중할 수 있다. 바닥에 가라앉아 저 멀리 수면을 바라보며 내 위의 존재들에 대하여 분노하고 열등감을 폭발시키기보다는 함께 가라앉은 존재들과 손잡고 위로 부상을 준비를 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허지웅은 역설적이게 우리가 서로의 고통에 무지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직시하는 것으로부터 서로에 대한 공감과 이해가 출발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결코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을 공감하고, 거기서부터 공통점을 찾으라는 것이다. 더 귀 기울이고, 더 생각하고, 더 이해하려고 하는 와중에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우리의 것으로 받아들임에 한없이 가까워질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허지웅의 [살고 싶다는 농담]은 바닥을 찍어본 작가가 함께 바닥으로 침몰한 이들에게 보내는 위로의 메시지이다.
그는 말한다
자, 이제 수면으로 올라가자고.
*본 서평은 영내 진중문고를 읽고 작성되었습니다. 양질의 도서를 장병들에게 제공하는 국방부에 감사를 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