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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닐라맛 교향곡 Apr 06. 2021

감정에 온전히 내맡김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읽고

알다시피 인간은 완벽하게 이성적이지만은 않은 존재다. 많은 부분에서 우리는 객관적으로 어리석은 길임을 앎에도 불구하고 특정한 선택을 하기도 한다. 이는 자신이 파멸할 것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도 신념을 위해 투쟁하는 숭고한 도전정신의 양태로서 나타나기도 하고, 어떨 때는 자신의 욕망을 주체하지 못해 스스로 파멸의 길로 들어서게 하는 치명적인 중독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한 감성의 지배적인 영역 중 하나가 바로 사랑일 것이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감정은 우리 이성을 관장하는 대뇌 피질이 진화하기 전, 그러니까 파충류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본능 중추인 R-영역이 탄생하며 형성된 동물적 감정에 기반하는 점이 크다. 그러므로 어쩌면 우리가 친구나 지인에게 건네는 정성 어린 연애상담은 무의미한 것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충고를 받아들임으로 해결될 수 있는 속성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무릇 사랑이란 어리석음의 결정체이며, 그러므로 달콤하다. 자신을 해할 것임을 앎에도 복용하는 일종의 마약인 셈이다.


프랑스의 작가 프랑수아즈 사강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는 이 점을 적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소설은 주인공 폴이 그녀의 애인 로제의 불성실함에 불만을 갖던 와중, 자신을 열렬히 사랑하는 시몬이라는 14살 연하의 청년을 만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폴의 마음은 로제에게 향해 있지만 로제는 결코 그녀를 똑바로 바라봐 주지 않는다. 반면 누가 보아도 수려한 외모인 시몬의 마음은 오직 폴에게만 향해 있다. 폴은 로제와 헤어지고 시몬과 만나게 되지만 얼마 되지 않아 시몬을 떠나 로제의 곁으로 다시 향하고, 로제는 예전과 같이 불성실한 모습으로 되돌아오며 작품은 마무리된다.


"사람 고쳐 쓰는 거 아니야."


절친한 친구가 말썽쟁이인 애인과 마찰을 겪고 있을 때 나는 이별을 추천하며 이렇게 말했다. 마찬가지로 주인공 폴에게 할 수 있는 '이성적'인 조언은 자신을 아껴주고 사랑해주며, 외모도 수려하고, 어리고, 장래 촉망받는 어린 변호사인 시몬과 함께 행복해지라는 것이다. 결론은 명백하다. 폴의 전 애인인 로제는 그녀를 생각해주지도, 배려해 주지도 않으며 창부와 놀아나는 그저 그런 놈팽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술했듯 누군가에게 빠진다는 감정은 이성이라는 공식으로 판단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폴에게 있어 아무리 시몬이 훌륭하다고 설득해 본들 그것은 공허한 외침에 불과하다. 이는 로제를 향한 그녀의 관심으로 말미암아 그녀가 종국적으로 불행한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점을 스스로 자각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는 인간은 스스로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고 굳게 믿는다.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는 것처럼. 그러므로 우리는 주인공 폴의 광기 어린 사랑에 답답해하면서도 경탄을 금하지 않을 방도가 없는 것이다. 그것이 사랑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읽음에 있어 방점은 폴의 자기 파괴적인 선택의 시시비비가 아닌 그러한 결론에 이르게 된 감정 그 자체가 되어야 한다. 로제가 폴을 대하는 태도로부터 나오는 진실되지 못한 사랑 표현, 그리고 그것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해야만 하는 폴의 슬픔에 겨운 답변. 마지막으로 그것들을 지켜보며 폴을 자신의 사랑으로 설득시키리라 다짐하지만 결국 실패하게 되는 시몬까지. 전지적인 독자의 입장에는 답답이들에 불과한 3인방의 이야기가 깊은 흡입력으로 순식간에 읽히게 되는 것에는 아마 그 세 사람의 모습 속에 우리들의 동물적이고 본능적인 부분이 투영되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우리는 결코 그 셋을 '이해'할 수 없지만, 결국에는 그들과 같은 운명을 맞이할 처지에 있는 존재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어떤 면에서 이 작품은 니체의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와 광의의 맥을 같이한다. 니체가 어떠한 선택의 결과를 알고 있음에도 스스로 인정하고, 어떻게 끝날지 앎에도 다시 한번 삶을 반복하여 그 결과를 껴안는 것이 삶을 온전히 살아내는 것이라고 설파한 것과 마찬가지로, 사강 또한 주인공 폴이 시몬과 함께 행복해질 수 없다는 사실을 작품 내내 인지하면서도 결국 작품을 다 읽게끔 만든다. 결과가 어떠한들 그 선택의 가치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결과를 앎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자기 파괴적 종국까지 자기 자신의 일부로서 껴안은 자세 그 자체가 우리의 존재 의의를 정의한다고 사강은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헤어진 애인을 동경해 마지않는다. 끝이 어떤지를 앎에도 불구하고 그 시절을 그리워한다. 가난하고 힘들었던 어린 시절을 그리워한다. 자유가 없었지만 나름의 행복이 있었던 군 복무나 학창 시절을 그리워한다. 우린 모두 스스로의 내면과 맞닿아 있는 시몬과 폴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우리가 사강을 오늘도 또 읽게 되는 이유가 아닐까.





*본 서평은 영내 진중문고를 읽고 작성되었습니다. 양질의 도서를 장병들에게 제공하는 국방부에 감사를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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