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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닐라맛 교향곡 Dec 12. 2020

실패를 마주한 자들에게 바치는 위로-[월든]을 읽고

  고등학교 영문학 시간, 미국의 작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Henry David Thoreau)의 [월든]을 강독했었던 기억이 있다. 기억을 더어 보면 10대의 내게 있어 [월든]은 알 수 없는 소리만 쓰인 재미없는 책이었다. 그래서 난 그 당시 또래들이 그러했듯, 책을 진짜로 읽는 대신 인터넷에 떠도는 요약본과 해설집을 읽고 수업에 임했다. 그러므로 내가 영문학에서 거의 낙제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은 것은 어쩌면 필연일 수도 있겠다. 아무튼 그 수업에서 내게 남은 것은 소로우는 미국의 유명한 자연주의자로서 당대에는 빛을 보지 못했지만 훗날 미국 문학에 한 획을 그은 문학가이자 사상가라는 점, 그리고 [월든]은 든 호숫가에서 소로우가 2년여간을 홀로 보내며 쓴 자기 성찰적 명작이라는 점이다. 그렇게 [월든]은 내게 "읽지 않았지만 읽은 것만 같은 책"이 되고 말았다.




소로우가 홀로 시간을 보냈던 월든 호수. 절로 철학자가 되는 풍광이다.





 하지만 생각건대 문학 작품은 같은 독자라도 읽는 시점에 따라 큰 울림을 줄 수도 있고, 아무런 감흥을 끼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이는 책이 변한다기보다는 독자가 변화하는 점에 기인한다. 고등학생이었던 내게 [월든]이 후자의 경우였다면, 몇 개월 전의 내게는 전자의 경우였다. 신병 위로 휴가간 방문한 교보문고에서 나는 마치 우연이라기엔 지나치게 시의적절하게도 소로우의 [월든]과 인생에서 두 번째로 마주쳤던 것이다. 간만의 휴가로 인해 싱숭생해진 기분으로 시내를 거닐던 한 신병에게 소로우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길을 잃고서야, 즉 세상을 잃어버리고 난 후에야 신을 발견하기 시작하고,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우리의 관계가 얼마나 무한한지를 깨닫는다." [월든], p191


 

  소로우가 말하는 바는 어쩌면 자명한 이치이기도하다. 한 인간이 스스로를 발견하는 방법이 자신과 세계와의 "관계'에 눈뜨는 것이라고 상정한다면, 자기 갈길만 가는 사람에게 이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관계란 자신이 마주한 길 뿐만이 아니라, 잠시 멈추어 주변을 바라보고 세상에서의 자기의 위치를 가늠해 볼 때에만 정립될 수 있기 때문이다. 빠르게 질주하는 이에게 가장 잘 보이는 광은 바로 정면이다. 반면 길을 잃고 멈춰 선 사람은 그제서야 자신의 주위를 둘러보며 자기가 어떠한 대지위에 발 딛고 서 있는지를 자각할 수 있다. 그리고 그는 목도할 것이다. 우리를 둘러싼 세상이 얼마나 광활하고 무한한 가능성으로 약동하고 있는지를 말이다.




  사랑하는 외할머니를 갑작스럽게 떠나보내고 장기간 준비하던 변호사시험에서 낙방했을 때, 나의 세상은 멈추어 선 것 같았다. 임종을 지켜드리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좌절했고 낙방으로 인해 인생이 칠흑 속이 멈춰 선 듯하여 절망했다. 하지만 소로우가 말했듯 오히려 멈추어 섰을 때 보이는 것들이 많았다. 좌절과 절망 속에서 비로소 고개를 들었을 때에서야 어두운 하늘은 반짝이는 별들로 수놓아져 있다는 것을 보았다. 첫째로는 항상 곁을 지켜주는 가족과 친구들이 보였다. 내가 아무리 나락으로 떨어진다 한들 소중한 사람들은 내 옆에서 나를 응원해 주는 것이다. 그다음으로는 내가 살면서 당연하게 누려왔던 다양한 기회들의 소중함이 반짝였다. 비교적 유복한 환경에서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은 기회를, 남들은 누리지 못하는 행복을 나는 과분하게도 가져왔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직 남은 행복에 감사하는 마음이 내게 다가왔다. 비록 소중한 한 분을 떠나보냈어도 내겐 아직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이 남아있다는 것에, 군 복무간 새로이 전우들과 소중한 인연들을 만들 수 있다는 점에, 그리고 전역 후에는 깨끗하게 새로이 다져진 각오로 다시 시험에 응시할 기회가 남아있다는 것에 비로소 감사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기만 소로우의 조언은 마치 몸에 좋은 약은 쓰다는 격언처럼 난해하다. 그의 글은 어떠한 때는 자애롭다가, 독선적 이게도 변한다. 어떠한 때에는 감사하다가 급격히 분노에 휩싸이기도 한다. 또한 주변 광에 관한 묘사를 하염없이 늘어놓다가도 갑작스럽게 세상의 이치에 대하여 설파한다. 그러므로 [월든]이 전하고자 하는 바는 모 작가의 [아프니까 청춘이다]와 같이 상처의 회복에는 하등 도움이 되지 않지만 고통만을 줄여줄 뿐인 싸구려 마약성 진통제가 아니다. 결코 쉽게 독파가능한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혹자는 소로우의 태도를 지루하고 난해하다고 비판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런 점에서 어쩌면 고등학생이었던 내가 [월든]을 읽기 어려워했던 것은 당연하다. 그때의 나는 [월든]을 처방받을 환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소로우의 조언은 실패와 좌절 앞에 선 사람이, 세상에 지쳐 잠시 멈추어선 사람이, 차분하고 맑은 명정(明正)의 상태에서 복용할 것을 요구한다. 그는 말한다.




  "보다 고차원적인 독서는 우리를 향락으로 어르고 고결한 재능을 잠들게 하는 행위가 아니라 정신을 집중하고 긴장한 채 까치발로 꼿꼿하게 서서 정신이 가장 맑은 시간을 바치는 숭고한 행위다." [월든], p,119



  이러한 관점에서 살필 때 흔히들 평가하듯 소로우를 '자연주의자'라고 칭하는 것은 옳지 않다. 소로우는 단지 고독의 가치를 이해했을 뿐이며 결코 스스로가 나머지와 떨어져 홀로 위대하고 고고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로우는 월든 호숫가에서 홀로 2년간의 시간을 보낼 때에도 세상과의 연을 끊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자신이 소중히 생산한 농작물들을 기타 생필품들과 교환하여 아직 그가 보다 넓은 세상의 일원이라는 점을 인정한다. 그가 진심으로 살고 싶어 했고 설파하고 싶었던 삶은 소박하고 감사할 줄 아는 삶이었다. 그가 만약 자연주의자라면 고전을 찬양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스스로 문명의 상징인 집을 짓지도 않았을 것이다.




  소로우의 삶에 대한 접근법은 각박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앞으로 달려가는 것에만 몰두하여 지금 발을 딛고 있는 대지에 무지하지는 않은가? 더 큰 집, 더 큰 차, 더 큰 명예를 얻는 것에만 몰두하여 주위 소중한 이들에게서부터 점점 더 멀어져 가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스스로 어둠 속 독립되고 고독한 존재지만 그 고독 속에서야 비로소 세상과의 관계를 온전하게 맺을 수 있다. 우리가 사는 이 지구 전체가 우주 공간에서는 하나의 점에 불과하다. 서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별에 사는 사람들 간의 거리가 얼마나 멀겠는가? 또한 치열한 사회 속 사람들 간의 거리는 어떠한가? 하지만 걱정하지 말라. 우리는 결코 외로움을 느낄 필요가 없다. 우리는 비록 떨어져 있을지언정 광활한 은하계에 함께 관계하며 속하여 있기 때문이며, 순간순간을 감히 여기며 우리의 삶을 온전히 살아내는 이상, 어두운 밤하늘은 자애로운 별빛으로 반짝이고 있을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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