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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Nov 14. 2021

<공항 가는 길>, 인생의 '두 번째 사춘기‘

이 나이가 오래된 것들이랑 한 두 개쯤 헤어지는 때인가 봐요

 KBS 드라마 '공항 가는 길'은 2016년 가을~초겨울 사이에 정말 재미있게 봤었는데 그 이후 매년 가을이면 이 드라마가 생각난다. 2016년 가을은 그때까지의 내 인생에서 두 번째 정도로 힘들었던 시기였는데(2020년 현재 기준으로는 네 번째 정도 아닐까), 이 드라마를 보면서(당시에는 솔직히 배우 이상윤을 보면서! 배우 김하늘도 그간의 여러 작품 중 가장 맞는 옷을 입은 듯 예쁘게 나왔다 내 기준엔) 현실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적당히 서늘한 바람이 마음속까지 솔솔 불어오고 쨍한 가을 햇살에 눈이 부시면.. ‘공항 가는 길’을 보기 딱 좋은 때이다.


 영화 <봄날은 간다>의 이숙연 작가가 극본을 썼다는 걸 알고 일단 1화를 봐 보자고 생각했었고 첫 회를 보니 영상, 음악, 분위기, 극본, 배우들의 조합 모두가 훌륭하여 계속 보게 됐다. 이 드라마를 본방까지 포함하여 총 3번을 봤는데 두 번째 볼 때까지는 멜로 자체에 중심을 둬서 봤던 것 같고, 작년 가을 세 번째로 볼 때는 조금 다른 부분이 더 눈에 들어왔다.

삼십 대 중반 이후 뭐랄까 오춘기가 찾아오면서 인생의 방향이 틀어지는 시기의 과정과 결과, 감정들을 아주 잘 포착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시기를 겪고 있는 나에게 꽤 위로가 됐다.


KBS 드라마 <공항가는 길> 공식홈페이지


  뒤늦게 드라마 소개를 찾아보니  “인생의 두 번째 사춘기를 겪는 두 남녀를 통해 공감과 위로, 궁극의 사랑을 보여줄 감성 멜로드라마”라고 소개되어 있었다. 궁극의 사랑까지는 모르겠지만 감성 멜로인 것은 맞고 그 앞 문장 “인생의 두 번째 사춘기”를 겪는 두 남녀를 통해 “공감과 위로”를 보여준다는 기획 의도는 적중한 것 같다. 이 드라마를 처음 시청할 때는 이 포인트가  크게 와닿지는 않았었지만 세 번째 볼 때는 감성 멜로 자체보다 두 번째 사춘기에 대한 부분이 이 드라마가 전달하려는 메시지의 본질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2016년 가을, 난 서른 넷이었는데 그 이듬해부터 작년 겨울까지의 3년 동안이 두 번째 사춘기의 절정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서른다섯에서 서른일곱 살까지의 3년이라는 시간이 인생에서 많은 것들을 바꿔놓았다. 나이 얘기를 구체적으로 하는 이유는 드라마 소개에 등장인물의 나이가 명시되어 있고, 그 나이 자체가 공감대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내가 겪은 두 번째 사춘기가(말이 사춘기지 정말 힘들고 처음 겪어보는.. 변화의 시기였다) 나만 겪는 건 아니라는 생각에 위로가 됐다. 관찰력 좋은 누군가에게 포착된 인생의 위기이자 터닝포인트 시기에 겪게 되는 사건들, 감정들, 변화들을 보는 것만으로 큰 위로다. 


주인공 최수아(김하늘)와 서도우(이상윤)의 나이는 모두 서른여섯, 최수아의 남편 박진석(신성록)은 서른여덟, 서도우의 아내 김혜원(장희진)은 서른다섯으로 설정되어 있다. 이들 모두 이 시기에 인생에서 아주 큰 변화를 겪게 된다.


이 나이가 오래된 것들이랑 한 두 개쯤 헤어지는 때인가 봐요
하던 일도 관두고.. 그리고.. 그런 때라고요


 최수아는 서도우를 만나게 되면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서서히 알아가게 된다. 그러면서 ‘오래된 것들’과 결별을 맞이하게 된다. 남편과 (남편과 함께 다니는) 직장을 떠나는 선택을 하게 되는데 결론에 이르게 되는 과정이 공감이 간다.


모든 문제의 답이 ‘그만두는 것’은 당연히 아니지만 삼십 대 중반에 맞닥뜨리게 되는 문제라는 것이 진짜 나를 찾아가는 성장통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제라도 나에게 맞는 새로운 곳으로 가는 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진짜 나를 점점 알아가게 되면서 그간 해온 선택의 틀 안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느낄 때, 막상 ‘그만두는 는 것’을 선택지 안에 두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감당해야 할 현실의 무게가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드라마에서 최수아가 말하는 ‘극복의 문제지 선택의 문제라고는 생각 못했어’라는 말은 그래서 무척이나 이해된다. 게다가 ‘선택’의 문제라고 생각하더라도 최종 선택을 하기 위해 고민하는 과정에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 그 선택이 나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끼칠 영향, 그리고 이런 고민이 사치스러운 건 아닌지 좀 더 견뎌봐야 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자책 등 수많은 생각과 감정들이 오간다. 그렇기 때문에 극 중 최수아의 고민에 대해 친구가 해주는 말은 내가 나 스스로에게 해주고 싶던 말이기도 하다.


너만의 이유, 너만의 상황 충분해.
그건 내가 보증해.
너, 애쓰고 살았어. 최수아 이제부터다.
어디에도 휘둘리지 마. 딱 너만 생각해.


 충분히 애쓰며 최선을 다해 살아왔다면, 외부로부터 타당한 이유를 찾을 것이 아니라 오로지 내 안에서 비롯되는 합당한 이유면 되는 것 아닐까. ‘딱 너만 생각해’라는 말은 무조건 이기적이게 되라는 말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시선, 평가, 입장에 대한 복잡한 계산과 생각으로부터 벗어나 본인의 마음 먼저 제대로 살펴보라는 뜻일 것이다.


어차피 선택에 대한 책임은 누군가에게 미룰 수 있는 게 아니라 본인이 오롯이 감당해 내야 하는 것이고,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을 선택할 줄 모른다면 나와 관련된 모든 것들이 제대로 돌아갈 수 있을 리 없다. 스스로를 올바른 방식으로 아끼고 사랑할 수 있어야 책임져야 할 다른 것들도 제대로 책임질 수 있다. 가장 이기적인 것이 가장 이타적일 수 있다는 말과 통하는 맥락일 것이다. 선택에 대한 내용은 최수아와 그녀의 딸 사이의 대화에서도 나온다.


최수아 딸(이하 딸) : 선택이라는 거 어려워

최수아(이하 엄마) : 좀 더 크면 샴푸도 이 향기로 해야 할지 저 향기로 해야 할지 선택해야 하고, 옷, 일, 사랑 선택해야 할 게 점점 많아져. 중심만 잡고 선택하면 돼. 중심엔 네가 있어야 돼. 남 말고.

딸 : 이기적으로 골라야겠네

엄마: 그게.. 조금 달라. 네가 강렬하게 끌리는 게 있을 거야. 음 눈을 감고, 뉴질랜드, 서울, 제주도 다 떠올려봐. 그럼 마음이 먼저 알아, 어느 하나가 끌려, 그걸 조용히 집중해서 봐야 돼. 무시해 버릇하면 평생 무시해.

(.. 중략..)

딸 : 그랬는데도 나중에 후회되면?

엄마 : 그건.. 그때 하면 돼. 다 장단점은 있어. 지금은 선택에 집중. 지금부터 천천히 연습하자.


 선택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나다운’ 선택을 하기는 더욱 어렵다. ‘무시해 버릇하면 평생 무시해’라는 말이 참 아프게 와닿았다. ‘작은 무시’들이 조금씩 오랜 시간 쌓이면 ‘나’는 없어지게 된다. 무언가를 선택할 때 부모님의 기대, 타인의 평가 등에 기반해 선택하다 보면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아예 생각조차 못 하게 된다. 누군가 나에게 바라는 것이, 내가 원하는 것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이게 무서운 건 가랑비에 옷 젖듯이 스며드는 것이기 때문에 스스로가 그렇게 살고 있다는 자체를 의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살아온 (나 같은) 사람들에게 삼십 대 중반은 말 그대로 두 번째 사춘기다. 나를 찾게 하는 뭔가가 찾아온다. 성장통은 세게 오지만 잘 겪어내면 그만큼 자란다. 드라마에서 최수아는 자신의 마음을 아주 충분히 살펴보고 선택을 한다. 선택 이후에 감당해야 할 현실은 버거운 것이지만 정면으로 마주한다. 그래야 진짜 좋은 걸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점검 끝. 이제 끝내야죠,
그래야 좋은 걸 당당히 누리죠

  선택은 마냥 미룰 수 없고 충분히 점검을 마친 후에는 선택을 해야만 한다. 중심에 ‘남’이 아니라 ‘나’를 두고 하는 선택, 그리고 그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한다. 마냥 무겁기만 한 것은 아니다. 어려운 선택 끝에 내가 얻게 되는 ‘좋은 것’이 분명히 있고, 그걸 당당하게 누릴 수 있다면 그 선택은 가치가 있다.


우리는 무언가에 얽매여서, 무언가의 눈치를 보느라 좋은 걸 있는 그대로 ‘당당히’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무언가를 버림으로써 잃는 것에 집중하기보다 그로 인해 얻게 되는 것을 마음껏 누리는 편이 나을 것이다.


 최수아&서도우가 사랑에 빠지고, 최수아-박진석 부부, 서도우-김혜원 부부가 헤어지게 되는 내용이라 불륜 드라마란 비판도 있었던 것 같다. 아마도 그 비판을 조금이라도 면하기 위해 박진석이나 김혜원을 대놓고 나쁘거나 크리티컬 한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인물로 설정했을 것이다. 어쨌든 드라마가 구축한 세계 안에서 이야기를 하자면 ‘진짜 나’의 모습을 발견해주고, 사랑해 주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한 사람의 인생에 아주 큰 변화를 끼친다. 변화는 그 자체로 힘겨운 것이지만 진짜 사랑을 하는 것은 진짜 나로 살아가는 것이기도 하기에 얻어낼 가치가 있다.



 물론 이렇게 극본이 훌륭하여 드라마의 내용 자체도 공감 가고 대사도 좋지만, 내가 이 드라마를 좋아하는 또 다른 이유는 연출 때문이다. 먼저 영상이 정말 좋은데 주 배경이 되는 공항, 한강, 서도우 고택과 작업실, 남산, 제주도 등 장면 장면은 가슴 설렐 정도로 그 분위기를 잘 담아내고 있다.


비 오는 새벽의 공항, 여명의 한강, 고요한 한낮의 고택,  서도우 작업실에서의 뷰. 그 순간들의 공기와 향기마저 알 수 있을 것 같은 감성적이고 감각적인 분위기가 너무나 좋다. ‘가을’ 자체가 세련된 색감 속에 잘 담겨 있어 보는 맛이 훌륭하다. 드라마 전체적으로도 시끄럽지 않고 여백이 있어서 무심코 틀어 놓아도 방해되지 않는다.  


  OST도 드라마와 잘 어울리는데, 선우정아의 ‘City Sunset’은 ‘사실 오늘 하루도 버거웠지 내 맘조차 지키지 못했는 걸. 초라한 발걸음 끝에 다 내려놓고 싶은 날’이라는 가사가 최수아의 버거운 일상을 잘 대변해주고 그런 그녀에게 위로가 되는 서도우의 존재처럼 은은하게 깔린다. 한희준의 ‘쓸데없이’는 서도우와 최수아가 서로의 존재를 통해 위로를 받고 설렘을 느끼는 장면과 무척 잘 어울린다. ‘이 향기 온도는 딱 너와 같아’라는 가사는 드라마의 성격도 잘 보여주는 표현인데, 화면에 담긴 공간의 향기와 온도가 느껴질 것 같아서 어떤 분위기를 그려내고 싶었는지 충분히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배우들! 이상윤은 레노버 노트북을 쓰는 서도우라는 캐릭터와 너무나 잘 어울렸다. 서도우는 여유와 배려, 좋은 취향, 적당한 장난기와 영리함이 잘 어우러진 캐릭터인데 이상윤과 너무 잘 어울려서 아들 이름을 상윤이나 도우로 짓고 싶기도 했지만 성과 잘 어울리지 않아 포기.. 김하늘은  말 그대로 머리부터 발 끝까지 세련된 스타일링을 보여줬는데 뭐 워낙 연기도 잘하고 최수아 그 자체였고.. 가정이 있고 일이 있는 삼십 대 중반 여성의 두 번째 사춘기를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잘 표현했다.


 좋아하는 드라마들을 꼽자면, 프로포즈(무려 97년도 작품), 햇빛 속으로(그래도 99년도), 발리에서 생긴 일, 그들이 사는 세상, 프로듀사, 봄밤 정도를 떠올릴 수 있겠는데 그중에 공항 가는 길은 세 번째 정도로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왜 이 봄의 절정에(업로드하는 지금 시점은 초여름이지만, 초안 작성 시에는 봄이었음) 가을 드라마 얘기를 쓰고 있는 건가 생각해 보니.. 한 번쯤은 정리해 두고 싶었나 보다, 두 번째 사춘기에 대한 이야기를. 아무튼 2020년 가을에도 어김없이 이 드라마를 다시 정주행 해 볼 예정. 그때는 ‘아 나의 두 번째 사춘기는 그래도 잘 지나갔구나’라고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


(2020년 6월 1일 작성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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