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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Jul 01. 2024

<졸업>, ‘낭만’을 이야기하는 용기

 ‘文學(문학)’이라는 두 글자가 대문짝만 하게 화면 한가득 잡히는 것을 봤을 때의 생소하고 묘한 기분이란. 드라마에서 이런 장면을 보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낭만적이다. 어쩌면 이 드라마는 낭만, 그 자체다.

tvN 드라마 <졸업>, 12화, 표상섭 선생 강의 장면


<졸업>은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의 홍수 속에서 ‘당장 눈에 보이는 빠른 성과는 없더라도,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기꺼이 말하는’ 드라마였다. 느리고 긴 호흡, 시적인 여백과 행간, 당장 명확한 정답과 풀이를 안겨주기보다는 그러니까 직접적인 방식으로 시청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반복 설명하는 방법을 사용하기보다는, 사유하고 상상할 수 있게 만드는. 내용과 형식이 이토록 일치하다니.


뚝심, 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자신만의 속도와 스타일로 '낭만'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감독에 대해서. 원래 둘이 이어지기 전 텐션이 찐이라며 혜진과 준호의 사내연애를 캐치한 전 멜로 영화감독 출신의 김현탁 원장(원장실에는 영화 <접속>의 포스터가, 그의 집에는 <8월의 크리스마스> 포스터가 걸려있다), 이준호 선생의 교육관이 헛소리가 아니라 선생님들의 로망이 아니겠냐는 표상섭 선생의 말, 남청미 선생이 목청껏 부르는 ‘낭만고양이', 드라마 내용에 맞춰 새로 만들어진 곡들이라지만 올드팝 분위기의 OST까지, 곳곳에 낭만의 흔적은 심어져 있다. OST를 LP 형태로도 출시한 것은 낭만 혹은 노스탈직한 것이 이 드라마에서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를 보여준다. 기본적으로 첫사랑 자체가 청춘의 낭만을 바탕으로 하고, 이 드라마에서 그 첫사랑은 낭만적 이게도 확실하게 이뤄진다.




서혜진이 시우에 대한 의리를 지키기 위해 더 좋은 계약 조건을 포기하고 대치체이스에 남기로 결정했을 때, 남청미가 우승희 부원장 및 그 패거리에 동참하지 않기로 결심했을 때, 혜진의 조교 민지가 부원장이 제시하는 금전적 조건을 포기하는 선택을 했을 때,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표현이 있다.


“(혜진) 나 진짜 좋은 결정 했다 그랬어~ (준호) 막 자기애가 흘러넘치셨구나? (..) (혜진) 네 말이 맞아 나 아주 오랜만에 내가 꽤 마음에 들어”(7화)

“(청미) 난 거기 안 끼기로 했거든요 그러고 나니 속이 후련하기도 하고 뭐. (승규) 자기애도 막 흘러넘치고?” (14화)

“(민지) 저는 제가 멋있으면 좋겠어요 (혜진) 너 지금 멋있어 스파이 같은 거 안 해도."(16화)

현실적인 조건에도 불구하고 내가 진짜 원하는 것, 내가 멋지다고 생각하는 것을 선택했을 때 나 자신이 얼마나 괜찮은 사람으로 느껴지는지에 대한 얘기들. 이 지점이 <졸업>에서 말하는 낭만이 아닐까. 위와 같은 낭만적인 선택으로 치르게 되는 대가는 표면적으로 매섭기도 하고 혹은 보상이 대단하기도 한데, 졸업에서는 이런 결정을 하는 여러 케이스를 보여줌으로써 용기를 북돋는다. 내 눈에 멋진 선택을 해도 괜찮다고 말이다.


15-16화에는 여러 등장인물들의 다양한 선택을 보여준다. 세상 난리통 속에 누군가는 음모에 동조하고, 누군가는 불의에 분노하고, 누군가는 단순하게 눈앞의 이익을 좇고, 누군가는 그 와중에도 더 열심히 공부하고, 어떤 이는 진짜 피해자 보다도 자신의 처지가 더 불쌍하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또 다른 이는 어른으로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다가 위기 속에 기회를 잡고 승부를 보기도 한다. 그 속에서 나라면 어떤 선택을 할까?


<졸업>은 어렵지만 이야기해야 할 것을 기꺼이 말하고, 보여주고 싶은 것을 보여주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겠다는 용기를 낸 드라마다. 사교육과 공교육, 교육자로서의 교육 철학 같은, 다루기 쉽지 않은 민감한 주제들. 하지만 아무리 다들 욕망을 향해 세상 치열하게 때로는 치사하게 살아간다 해도, 나는 내 마음이 향하는 곳과 본질을 추구하며 조금은 낭만적이게 살아보면 어떨까, 그러면 어떤 일이 펼쳐질까라는 질문들. 다 똑같이 한 방향으로 살 필요는 없지 않냐며 조금 다른 길을 가면 정말 큰 일 나는 거냐고 묻는다.

출처 tvN <졸업> 공식홈페이지, 12화

사실 난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봄밤>, <밀회>에 대해서는 더 세부적으로 리뷰를 썼다. 이 드라마는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사실 쓰는 것을 시도는 했다. 같은 선생과 제자 간의 관계를 그렸어도 그 나이차라는 것이 <밀회>와 달리 <졸업>에서는 '세대 간의 갈등'을 보여주는 기능을 한다. <밀회>에서는 스무 살의 ‘나이차에도 불구하고’ 서로 진정으로 사랑하고 그 사랑을 통해 오혜원이 가짜를 깨고 나와 진짜 자신을 마주하게 되는 이야기였다면, 혜진과 준호의 나이차는 신구 갈등을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장치다.


조직 내에서의 세대 갈등, 부모와의 세대 갈등 등 이 드라마는 기성세대와 신세대 간의 갈등을 여러 변주를 통해 드러낸다. 이 내용에 대해 써볼까도 생각했지만 써 내려가는 것이 크게 재미가 없었다. 결말까지 놓고 봤을 때 이 드라마를 관통하는 본질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물로 그 갈등의 대화씬들은 단연코 <졸업>의 백미다.


지금은 낭만을 이야기하기로 선택한 용기에 대해서 쓰고 싶다. 그것이 현재의 나와 가장 맞닿은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내용과 형식 모두를 통해 이를 보여주려고 한 것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누군가 말도 안 되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서도 기어코 어떤 길을 가는 것을 보면서 힘을 얻는 때도 있지 않나.


<봄밤> 이후로 안판석 감독의 드라마를 정말 오래 기다렸다. 누구에게나 이루지 못한 간절한 꿈이 하나쯤 있을 것이고, 그 또한 그렇지 않을까. 그래도 현실에 매여 재껴 두었던 어떤 꿈을, 의무적으로 '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것'을 마침내 꺼내 보라고, 결과는 장담할 수 없고 오롯이 스스로 감당해야 할 몫이지만 그 과정을 겪으며 우리는 겉만 번지르르한 어른이 아니라 비로소 미성년에서 성년으로 나아간다고 조금 먼저 어른이 된 누군가가 말해주는 것 같다.


준호는 혜진이 그에게 ‘넌 뭐든지 할 수 있는 애’라고 말했던 걸 떠올리고, 그녀의 공든 탑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상황에서 혜진에게 다시 그 말을 돌려주고 싶어 한다. 그러니까 준호가 혜진에게 당신은 학원 강사 아니어도 뭐든 할 수 있는 사람이에요,라고 말할 때 혜진은 답한다.


“안 받아, 내가 그 말을 어디다 써. 나 서른다섯이야.” (15화)


서른 다섯 즈음의 나는 내가 멋지다고 생각하는 선택을 하지 못했다. 용기가 없었다기보다는 혜진처럼 선택지가 없다고 생각했던 게 맞다. 그 시절을 겪고 나니 알겠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선택하는 용기는 파워 오브 러브에서 나온다. 내가 나를 사랑해야 기꺼이 내가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


어깨에 상처가 생기고 손목이 나가고 발뒤꿈치가 까져도 제대로 자지도 먹지도 못하고 마음에 총 맞은 것처럼 커다란 상흔이 생겨도 괜찮다고 하며 스스로를 귀하게 여기지 못했던 혜진은, 끼니를 챙겨주고 몸과 마음의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사랑을 받으면서 점진적으로 변화한다.


결국 혜진은 '발밑이 무너지고 멘탈이 붕괴되는 인생의 사건사고'와 '사랑'을 동시에 경험하면서 비로소 눈이 뜨인다. 이는 감독의 전작 <봄밤>이나 <밀회> 등에서도 등장하는 표현과 맥락인데, 진짜 사랑을 시작하는 것 = 평탄한 줄 알았던 인생에 사건사고의 시작이 되고 이를 통해 밑바닥까지 추락한다. 삶의 방향이 전환된다.


“너는 너 때문에 내 공든 탑이 무너졌다고 했지만 아니, 난 그거 아닌 거 같아. 되려 오래도록 내 눈을 가리고 있던 막이 걷혔다고 해야 하나. 그랬더니 보이더라. 옛날부터 했어야 했던 내 공부.”(16화)


그녀에게는 자신의 인생의 서사를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각성 후 통찰력이 빛을 발한다. 한병철은 책 <서사의 위기>에서 "문제 풀기에만 몰두하는 사람에게 미래는 없다. 서사만이 비로소 우리로 하여금 희망하게 함으로써 미래를 열어준다(38면)"고 말한다. 우리는 삶의 고통 속에서 자신만의 이야기를 하고 서사적 성찰을 함으로써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 혜진은 인생의 위기 속에서 자신만의 의미를 찾아내는 작업을 완수한다.


오늘날 서사의 위기는 철학에도 해당되며, 철학을 종말로 이끈다. 우리에겐 더 이상 철학을 향한 용기, 이론을 향한 용기, 즉 이야기할 용기가 없다. 우리는 사유가 결국 그 자체로 이야기라는 것과 이야기의 단계를 거쳐 나아가는 과정임을 지각해야 한다.(한병철, <서사의 위기>, 2023, 다산초당, 110면)


혜진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이야기함으로써 새로운 여정이 시작되고, 이 드라마는 이야기를 통해 사유의 과정을 보여주며 세상을 변화시키는 작은 행위를 실천한다.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이야기해 낼 용기가 없는 시대에, 쉽지 않은 것을 이야기할 용기를 냈다. 중요한 건 정답이 아니라 과정이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이야기할 수 있고,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 진짜 원하는 것을 선택해 봄으로써 자기 자신이 더 사랑스러워지는 선순환을 이룬다. 빛나는 졸업장에 다름 아니다.


드라마의 아쉬운 점에 대해서 말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사람들을 존경한다. 창작물을 감상하는 나보다는 관련 내용에 대해 천배쯤 더 고민했을 것이다. 그것이 곧 완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간의 작품을 통해 안판석 감독과 그와 함께 하는 작가들의 성실함을 인정하게 되었다. 세상에 완벽한 결과물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고, 한계 속에서의 최선을 믿고 본다. 단점에 주목하기보다는 장점을 흡수하는 편이 낫다는 생각이다.


정려원과 위하준, 두 주연 배우들의 연기 또한 편견을 깼다. 그래서 더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안판석 감독 드라마에는 나오는 사람들만 나온다고 하지만(멋진 뉴페이스도 많이 나온다) 나는 반갑다. 조연까지도 그 배우의 여러 면모를 볼 수 있어서 보는 재미가 있다. 안판석 감독이 현장의 워라밸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스타일이라는 내용의 기사를 언젠가 본 적이 있는데, 서로의 스타일을 잘 파악하고 있을 때 효율적인 결과물이 나오지 않을까? 본질에 집중하고 효율적이게 자원을 배분하기 위해 택한 방식은 아닐까 추측해 본다. 내게는 뉴페이스였던 김송일, 황은후, 차강훈 배우가 특히 눈에 띄었는데, 앞으로의 연기도 무척 기대된다.


15회-16회로 이어지는 흐름이 뭐랄까 내 마음은 조급한데 카메라가 비추는 장면들은 한없이 여유 있어 혼자 속으로 애를 태웠다. 위 배우들의 연기를 더 볼 수 없어서 아쉬운 마음도 컸던 것 같다. 모든 것이 깔끔하게 속 시원하게 딱딱 떨어지는 결말을 우리는 자주 원하지만, 인생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에서 그런 일은 잘 없다. 드라마가 끝난 지금도 어디에선가 살아가고 있을 사람들처럼 입체적이게 인물을 그려내는 것은 안판석 감독 작품의 장기인데, 그래서인지 뭔가 더 펼쳐질 이야기가 있을 것만 같다. 용기를 내 낭만을 선택한 인물들의 여정은 어떨지 혼자 상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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