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5년 전,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랑스러운 아이를 임신했을 때 다니던 산부인과 원장님이 내게 해주셨던 말을 고대로 옮긴 문장이다.
"사람은 걱정한 만큼 손해예요"
팬티에 묻은 손바닥만 한 피를 보고 또 유산의 징조인가 싶어 울면서 병원으로 달려갔었다. 다행히 아기는 잘 움직이며 잘 놀고 있었다. 그날 그 자그마한 생명체의 심장소리도 들었다. 처음 들어보는 소리였다. 왜 인지 모르지만 울음을 참았다. 초음파를 확인하며 원장님이 조용히 말했었다. 사람은 걱정한 만큼 손해라고. 그 말이 지금까지도 내 마음속에 어떤 격언처럼 남아있다.
자연임신 후 화학적 유산, 시험관 1차 임신 후 소파수술. 시험관 1차에 착상에 성공했지만 아기집은 텅 비어있었고 결국 수술을 했다. 그런 후 3개월도 채 되지 않았을 때 자연임신으로 찾아온 아이였다. 다시 임신이 됐지만 2번의 유산으로 내 마음은 두려움과 염려로 가득 차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 되었다. 혹시라도, 혹시라도 또 잘못되면. 유산의 경험 때문만은 아닐 수도 있다. 어린 시절부터 내 몸에 각인된 불안감까지 겹쳐 나의 두려움은 순간순간 과열됐다.
태명조차 일찍 짓지 못했다. 함부로 부르지 조차 못할 만큼 소중했고, 그만큼 두려웠다. 잃을까 봐. 한동안은 가까운 주변에도 당연히 알리지 못했다. 코 앞에 복직을 앞두고 있었기에 회사 인사팀에 말했던 것(복직 연기) 빼고는. 두 줄을 확인하고 남편에게 알릴 때도 마음껏 기뻐하지 못했다. 너무나 선명한 두 줄에 눈물이 차오르면서도 또 유산이 찾아올까 봐 무서웠기 때문이다.
매일이 나 자신과의 작은 싸움이었다. 순간순간 차오르는 불안을 긍정적인 생각들로 바꾸는 일. 거의 28주까지 입덧이 무척 심했고 입덧이 늦게 끝난 후에는 체력도 떨어져 있고 배도 큰 편이었어서 움직임에 제한이 컸다. 약간의 우울감이 절로 생겼다. 그래도 입덧 종료 후 먹고 싶은 음식들을 즐겁게 먹고, 태교 여행은 안 가도 여행 비용 정도의 좋은 스피커를 구입해 양질의 음질로 듣고 싶은 음악을 마음껏 즐겼다.
이 시기에 퇴사도 했다. 주체적으로 결정한 첫 번째 선택. 회사는 내게 애증이었다. 회사 때문에 죽을 만큼 힘든 시기도 있었고, 회사 덕분에 따뜻하고 좋은 기억들도 있었다. 오랜 시간 그곳이 내 삶에서 큰 자리를 차지했기에 감히 실행에 옮길 수 있을 것이라 상상하지 못했다. 퇴사는 내가 나에게 준, 나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하게 해 줄 가장 좋은 선물이었다. 한 번 헤어질 결심이 서자, 마음에 어지럽게 떠다니던 부유물들이 착 가라앉고 고요해졌다.
아이는 뱃속에서 무럭무럭 건강하게 자랐고, 결국 34주 1일 차에 태반조기박리로 인해 응급으로 조산하긴 했지만 그 자그마한 아기는 피를 마시고 나오면서도 씩씩하게 살아남았다. 갑자기 급박하게 진행된 모든 과정 속에서 살려주세요, 도와주세요라는 두 문장만으로 나는 기도를 했고, 전신마취 다음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신의 영역이다. 나는 한 치 앞을 모른다. 나는 모든 걸 계획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다. 그저 할 수 있는 한 오늘을 나름의 최선으로 사는 것 밖에는.
그 하루를 걱정으로 채운다면 나의 내일은 걱정으로 채워진 어제가 만든 오늘이 된다. 그렇게 매일이 쌓이면 복리처럼 걱정을 적립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지금의 걱정을 내려놓자. 손해다.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할 수 있는 만큼 했고 나머지는 내 손을 떠난 일이다. 어떤 일이 생기면, 닥치면 그때 대응하면 된다.
조산에 이르렀을 때 내가 모르는 행운과 내가 모르는 불운이 겹쳤을 것이다. 그것을 속속들이 파악할 수는 없다. 너무 무섭고 힘들었지만 결국 다 지나갔다는 것. 어쩌면 내가 의식이 없어서, 내 몸이 너무 지쳤어서 더 잘 지나갔다는 것.
결국 이른둥이로 태어나 인큐베이터에 2주 있었던 아이를 응급실하나 제대로 없는 지금 살고 있는 동네로 데려왔고(지금은 생겼다), 아이는 무탈하게 신생아 시기를 보냈다. 내가 뭘 잘해서가 아니다.
나를 굽어살피는 누군가 적절한 양의 도움을 적시에 주고 견디게 한다. 내가 걱정해 봐야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그러니 좀 천진난만하게 걱정 없이 발 뻗고 지내보자
내가 불행이나 불운을 걱정해야만 그것이 피해 갈 것이라고 저항하지 말고, 쫄보 같은 마인드로 위축되어 살지 말고, 정신 차리고 제대로 생각을 하자.
염려는 생각이 많아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바른 방향으로 끝까지 제대로 생각해내지 못해 생기는 일이다. 일종의 정신적 게으름이다. 당당하게 어깨피고 걱정 없이 기다려보자. 끊임없이 차오르는 새로운 걱정과 두려움에 나의 오늘을 저당 잡히지 말자. 신의 영역이 아니라 하물며 인간의 지혜로도 그것은 내 귀에 차분하게, 하지만 따뜻하게 울린다.
얘야, 사람은 걱정한 만큼 손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