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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통 Aug 05. 2024

김 훈의 <허송세월>을 읽고…

허송세월도 바쁘다는 작가 처럼 살아야 귀한 세월이 많아져


한 사람을 생각하면 그 사람으로 인하여 다른 사람에 대한 생각은 없어진다. 사물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물을 생각하면 다른 사물에 대한 인식이 물러진다. 오직 눈 앞에 보이는, 또는 어떤 사건에 연유된 사람과 사물에 대한 집착으로 생각이 형성된다. 

나는 김 작가의 글이 그렇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는 알겠는데, 그가 쓴 글로 이해하기에는 내가 많이 모자람을 자주, 그리고 많이 느끼곤 한다. 그래서 작가의 책을 자주 접하지 않았다. 몇 년 전 읽은 책이 한 권 있는데, 제목을 기억 속에서 끄집어낼 수 없다. 그만큼 뼈를 때릴 정도의 강렬함을 느끼지 못했다. 깊이 돌이켜보건대, 아미 중간에 책을 덮지 않았나 싶다.

그래서 실제로 그의 책을 온전히 읽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앞서 몇차례 시도했지만, 중간에, 아니 초반에 덮고 말았다. 글과 문장의 이해 부족으로 인한 머리 탓만 했다. 직선 도로의 글 타입을 좋아하는 나로선 작가의 글은 늘 골목길을 돌고도는 느낌 때문이었다.

그러나 허송세월은 전혀 달랐다. - 물론 앞서의 무모한 작가 관점은 나의 허접한 문해력이 가장 큰 이유였을 것이다. - 허송세월은 마치 작가의 삶 속에 묻어있었던 부스러기 같은 씨앗들이 책 속 글자의 빨간 벽돌이 되어 튼튼하고 멋진 주택을 완성한 듯 했다. 

그가 걸어온 세월이 ‘허송세월’이 아니라는 것 쯤은 작가의 약력과 작품을 꿰차고 있으니 빈 말 또는 농담으로 자리를 잡아 주었다. 그런데 책 표지 4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혀가 빠지게 일했던 세월도 돌이켜보면 헛되어 보이는데, 햇볕을 쪼이면서 허송세월할 때 내 몸과 마음은 빛으로 가득 찬다. 나는 허송세월로 바쁘다.’

술 마시고 나면 술이 지겨워서 빨리 깨고 싶고, 술 깨면 세상이 너무 환해서 마시고 싶으니, 술이란 무엇인지 술을 마셔도 알 수 없고 안 마셔도 알 수 없는데, 사람들아 어쩌자고 자꾸 마시는가. _38쪽

한 때는 술로 사는 세상들 속에 있는 우리들이었다. 술을 탓하는 것 보다는 오히려 권주가가 아닐까 싶을 정도다. 그의 필력이 이르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혼밥을 먹는 사내들은 혼술을 마신다. 혼밥에 혼술을 마시는 사내들은 거무튀튀하고 우중충하다. 하루의 노동을 마친 저녁에 '고향'에서 혼술을 마시는 사내들의 술맛을 나는 안다.

소주는 면도날처럼 목구멍을 찌르며 넘어가고, 몸속의 오지에까지 비애의 고압전류가 흐른다. 그 사내들의 창자에 스미는 김치찌개 국물과 돼지고기 한 점의 맛을 나는 안다. 그 국물 한 모금의 얼큰함과 고기 한 점의 육기가 창자에 스며서 비애의 모서리를 순화시켜 준다. 살아간다는 사업의 무망(無望)과 회한 속에서도 그 맛은 비애를 삭히고, 삶의 불씨를 잿더미 속에 잠재워서 보존한다. '고향'에서 혼밥을 먹을 때 나는 여러 혼밥꾼들과 길에 앉아서 나의 혼밥을 먹지만, 나의 혼술 맛으로 다른 사내들의 혼술 맛을 헤아려 알 수 있고, 여러 혼술들이 이 술맛의 고압전류로 이어져 있음을 안다. _168쪽

음식은 삶이다. 아니, 음식은 삶의 지식이다. 김치찌개 국물과 돼지고기 한 점은, 식탁에 놓여진 우리네 삶의 그림 같은 풍경을 만들어준다. 더불어 혼술은 인생의 본태적 모습이고….

지금보다 젊었을 때 나는 태풍전망대에서 소나기를 만나면 나무처럼 두 팔을 치켜들고 비를 맞았다. 짧은 바지와 짧은 티셔츠 차림으로 소나기를 맞으면 빗줄기는 내 맨몸을 직접 때리고, 몸의 구석구석을 흘러내린다. 그때 나는 한 그루의 나무였는데, 지금은 신명이 줄어서 이런 기막힌 놀이를 할 수가 없다. _98쪽

가을의 끝자리에 두루미의 무리는 이 산천을 건너온다. 두루미의 자태는 독립된 생명체로서 당당하다. 두루미는 무리를 이루며 날아올 때도 그 개별적 존재의 위엄을 잃지 않는다. 두루미가 날아올 때, 이 산천은 문득 창세기의 그날로 돌아간다. 두루미는 인간의 역사에 의해 오렴되지 않은 시공을 건너서 온다. 두루미는 날개짓 두어 번만으로 그 넓은 산천을 무착륙으로 건너 오는데, 이 날개짓은 비행이라기보다는 시간 위에 올라탄 흐름처럼 보인다. 두루미가 하늘을 날아올 때 두루미의 그림자가 땅 위로 따라온다. 그림자는 땅 위를 스쳐 가고 자취를 남기지 않아서, 그림자는 두루미로부터 비롯되지 않았고 두루미의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_99쪽

책을 받아 들고 거듭 제목이 와 닿았다. 60이 넘어선 나이쯤 되니 '허송'이라는 단어를 그냥 강물처럼 흘려 보낼 수 없어서 였을거다. 허송세월이라 할지라도 누구든 삶의 자취는 남는 법이 아니겠는가. 그것은 두루미가 날개짓을 하듯 사람은 삶의 호흡이 죽지 않도록 흥과 신명이 식지 않게 해야 함을 말함이리라.

'금수저', '흙수저'는 '대중식사'와 근원 정서의 토대를 공유하고 있지만, 풍자와 저항의 힘에서는 '대중식사'를 넘어선다. 금 과 흙은 사회경제적 특권의 서열이고, 밥은 아무도 피해 갈 수 없는 인류 공통의 운명이다. 금, 흙이라는 길료의 명칭이 '수저'와 결합해서 빚어지는 이 신조어는 불평등이 양극화되고 특권이 세습되는 신분사회에서 노동을 팔아서 밥을 벌고, 수저질을 해서 밥을 먹어야 하는 사람들의 절망과 울분을 풍자적 체념으로 표출하고 있다. 이 체념 섞인 울분의 신조어는 '수저'라는 공동의 운명을 금과 흙에 모두 배치함으로써 단어 그 자체로 독립된 비극을 이룬다. _170쪽

사람이 만들고 사람이 상처받는 것, 그것은 바로 ‘말’이다. 수저의 본연의 역할이 왜곡되자 완곡한 표현으로 나무란다. 이렇게 작가는 사회적 목소리는 늘 울림이 준다. 

키스에서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점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키스뿐 아니라 인간의 생애와 세계의 역사 속에서도 그러하다. 키스에서는 이 같은 시점 구분의 무의미함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는데, 그것은 키스가 강렬하게 집중된 행의 체험이고 생명의 분출이기 때문이다. 또 여러 키스의 느낌을 비교해서 설망한다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필요하지도 않다.

현재의 시간 위에서 키스를 수행하면서, 이 키스는 지난주의 키스보다 맛이 덜하구나, 라고 생각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만일 그런 생각이 들었다면 그것은 지난번의 키스가 잘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지금의 키스에 진정성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는 키스가 성립되지 않는다. 이것은 키스에 미달하는 단순 접촉이며, 키스가 아니다. 이런 사람들은 키스할 자격이 없다. 마찬가지로 지금 키스를 수행하면서, 다음번에 하게 될 키스가 지금의 키스보다 느낌이 더 좋을지 어떨지를 생각하는 사람도 키스를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키스를 키스답게 할 줄 하는 사람은 지나간 키스의 맛을 회상할 수 없고, 미래의 키스의 질감을 예상할 수 없고, 앞날에 또 다른 키스를 하게 될는지조차도 알 수 없다. 키스는 현재의 폭발이고, 함몰이고, 신생(新生)이기 때문에 과거와 미래에 속박되지 않는다. 이것이 키스의 본질이다. _206~207쪽

작가의 사랑관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작가는, 키스는 현재에 집중하여 하라는 정의를 내리면서도 키스의 자격을 정리해준다. ‘키스는 현재의 폭발’이라는, 조금은 과격한 표현은 연인들에게 긴장감과 책임감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 아닐까 싶다.

금년 봄부터 전국의 거리에 여러 정당들의 정치구호를 적은 현수막이 가득 내걸렸다. 법이 바뀌어서 마음대로 걸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현수막의 내용은 논리나 비유나 문맥이 성립되지 않는 욕지거리, 악다구니, 상소리, 저주, 증오, 과장, 거짓말, 가짜뉴스들이었다. 

그것은 치매의 깃발처럼 대도시의 중심부에서 봄바람에 펄럭이고 있다. 그 현수막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이 나라가 돌이킬 수 없이 쓰레기통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_209~210쪽

중진급 국회의원이 월급 많이 주는 대기업에 자기 자식을 부정취업 시키고, 끗발 좋은 부모들이 권력자들에게 자기 자식의 취업을 부탁해서 남의 자식의 취업 기회를 박탈하는, 이 오래된 갑질의 전통도 '아이고 내 새끼야'에서 비롯되었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내 새끼'를 앞세운 이 갑질의 전통은 유구하고, 밥술이나 먹게 되자 이 갑질은 더욱 권력화되고 일상화되었다. 얼마나 많은 청년들이 '내 새끼' 갑질 앞에서 미끄러지고 넘어졌겠는가. 끗발 없는 부모 밑에서 태어나서, 그날그날 힘들게 살아가는 젊은이들은 이 더러운 세상에 만정이 떨어져서 아기를 낳지 않는다.

남의 자식을 짓밟고 '내 새끼'를 밀어붙이는 이 고위층 갑질의 역사가 계속되는 한, 저출산 정책에 수십 조를 퍼부어도 그 결과는 모두 헛것이 되었다. 이제 "아기가 타고 있어요"도 점차 사라지고 "힘쎈 꼰대가 간다"만 남을 판이다. _252쪽

현수막민국은 사람사는 동네의 공기를 흉하게 만들고, 바람에 출렁거리는 현수막은 주변 환경과 사람들의 마음을 병들게 한다. 가장 후진적인 집단에게 내놓은 작가의 쓴소리가 그들의 귓속까지 글자 하나 새지 않고 당도하기를 바래본다. “제발, 정신차려라 정치인들아!” 대한민국의 갑은 그대들이 아니라 국민들이다.

오산을 지나자 왼쪽에서 날이 밝기 시작했다. 해는 가려 있엇고 빛이 구름 뒤에서 배어 나왔다. 구름이 터진 틈을 따라서 빛은 하늘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길게 퍼졌고 빛의 중심부가 타올랐다.

이 빛은 세상에 처음 내리는 빛이었는데, 모든 빛은 처음의 빛이다. 새로운 빛 속에서 인간의 신생은 가능할 것이 틀럼없었다.

탐욕을 내지 마라, 성내지 마라, 어리석은 생각을 일으키지 마라, 게으름 부리지 마라, 뽐내지 마라, 남에게 베풀어라, 혀를 너무 빨리 움직이지 마라, 새로워져라….

늘 접해서 별 느낌을 주지 않던 옛글의 구절들이 벼락 치듯 마음을 때렸다. 살려는 사람들로 가득 찬 고속도로 위에 새로운 빛이 내렸고, 자동차들이 빛 속을 달려갔다. _216~217쪽

작가의 일갈은 교훈이다. 학창 시절 교실 전면부 높은 곳에 붙어있는 급훈처럼, 정신을 차리게 한다. 머리 속에서 뛰쳐 나와 바로 실행으로 연결해주는 따끔한 회초리 같다. 어쩌면 집단지성의 힘을 키우는 역할을 해주는, 요즘 쉽게 만날 수 없는 사회의 귀한 어른이시다. 

글에서나 사진에서나 1인칭만으로는 세상을 구성할 수가 없다. '나'가 물러서므로 3인칭은 겨우 드러난다.

1인칭과 3인칭 사이에 '너'가 있음으로써 인간은 복되다. 3인칭을 2인칭 '너'로 변화시켜서 끌어당기는 몸과 마음의 작용을, 쑥스럽지만 '사랑'이라고 말해도 좋다. 잘 드러난 3인칭은 대상으로서의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너'가 되어서 나에게로 다가온다. _259쪽

너와 나가 만나 함께가 된다. 따로 또 같이, 그러니 결국 ‘우리’가 되는 것이다. 사랑이란, 이처럼 서로가 있음으로 성립되는 것이 아닌가. 사랑으로 다가갈 수 있는 너와 나가 되었으면, 그것은 세월의 덧없음을 좀더 늦게 인식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그러면 허송세월도 바쁘다고 인식하게 될 것이다. 김 작가처럼….

책을 덮으면서 이런 느낌이 들었다. 별이 무수한 밤하늘을 보고 그 아름다움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쏟아지는 별을 받으려 손를 내밀었다. 손 안에는 ‘허송’이 들어왔다. 날이 밝아오면서 하늘은 파래지고 그 많았던 별은 사라졌다. 들여다 본 손바닥에는 아직도 별은 도착하지 않았다. 대신 별보다 귀한 ‘세월’이 들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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