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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라봄 Oct 13. 2023

받아들임

누구나 가리고 싶은 기억이 있다

"인간은 과거와 현재, 미래라는 관념을 만들고 거기에 집착합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늘 불행한 것입니다."

김영하 작가의 작별인사에 나오는 문장이다.  나는 이 문장이 마음에 걸렸다. 알듯 말 듯 마주하고 싶지도 그렇다고 너무 큰 사건이 아니어서 누군가에 공감을 받지도 못하는 내 과거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차라리 할 것만 딱딱 해내고 과거와 미래는 없는 현재만 사는 로봇이 되고 싶기도 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학교에서 실외수영장으로 놀러 갔다. 다른 친구들은 물속에서 신나게 놀았다. 나는 백반이라는 피부병이 있어 사복을 입고 모자를 쓴 채 그늘에 앉아 있었다. 친구들은 햇볕이 내려쬐는 맑은 날이었고 나는 먹구름이 잔뜩 날이었다. 나의 먹구름은 친구들과 함께 찍은 단체사진 속에도 남아있다. 성인이 된 지금도 그 장면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이제 꿈에서도 나온다. 맘껏 놀고 싶던 10대의 내가 안쓰러웠고 한편으론 수영장을 보낸 엄마가 원망스러웠다.


엄마를 원망하는 마음이 잔잔히 남아있던 나는 퇴근 후 소파에 누워 친구가 보내준 법륜 스님 영상을 보았다. 과거에 집착하고 후회하지 말라는 말, 이것도 습관이라고. 어떻게 태어났는지, 어떻게 자라왔는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지금이 중요하다, 살아있는 지금이 전부라는 말씀.


습관이었다. 나는 이 과거를 곱씹는 게 습관처럼 남아있었다. 그렇게 나를 괴롭히면서 밑바닥까지 내려가는 건 쫄보라 하지 못다. 그때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제주에서 시킨 생갈치를 내일 아침 갖다주고 출근한다고 하셨다. 엄마를 원망하고 탓했던 마음에 다시 죄스러움이 더해졌다. 요 며칠 내게 스며든 생각은 ‘나는 왜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할까?’였다. 더 나은 나를 꿈꾼다는 걸 글을 쓰며 알게 되었다. 더 나은 내가 되려면 지금의 나를 인정하는 일이 우선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머리는 알겠는데 가슴으로 내려오지 않는 이 마음을 어떻게 하면 풀 수 있을지 답답했다. 그때 골디락스 작가이 떠올랐다.


<우리 가족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작년도 브런치 스토리 대상작이었다. 읽어보고 싶었는데 미뤄두었다. 오늘이 이 글을 만날 때다. 그녀의 모든 글을 읽어나갔다. 마지막 이야기는 받아들임이었다. 이 어찌할 수 없는 과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은 저자의 말대로 쉽지 않았지만 갑자기 너무 평온하게 이런 마음이 들었다.


-나는 지금 피부병이 없잖아. 햇볕도 마음껏 쬘 수 있잖아. 그런 과거가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잖아.

라고.


6학년 사진 속의 나와 상황에 매몰되어 있었음을 알아차렸다. 햇볕을 못 쬐던, 마음껏 야외에서 뛰어놀지 못한 내가 빛을 향 걸어 나오는 거 같았다.


나는 살아있다. 어떤 사실이 살아있음보다 강력하지는 않다. 게다가 그 어린 시절 놀림거리였던 피부병, 나를 움츠려 들게 했던 백납이라는 피부병, 나를 그늘과 교실에 앉아있게 했던 그놈과 작별했다. 완치했다. 그러니 내게 남은 건 그 순간을 떠올리며 우울해하는 게 아니라 지금을 생생하게 느끼며 살아가는 일이다.     


엄마와 황톳길 맨발 걷기를 했다. 엄마의 오른발에는 발을 1/3 정도 덮은 큰 점이 있다. 엄마는 아직도 검은 반점이 있고, 나는 얼굴에 흰색 반점이 있었다.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나 어렸을 때 백반증, 백납 언제부터 그랬지?

-초등학교 4학년때였잖아.

-중학교 때는 없었지?

-아니, 중고등학교 때까지 약 먹었지.


그렇게 오랜 시간 나는 약을 먹었구나. 엄마의 말에 의하면 초등학교 때까지는 병원을 같이 다녔고, 후로 토요일엔 학교를 가니 일요일에 병원을 같이 다녔고, 더 후로는 엄마가 약만 처방받아 왔다고 했다. 엄마는 백반증 걸린 다른 가족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이 말이 하고 싶었다.

-우리 엄마 고생 많으셨네. 나는 그렇게 오랜 시간 약을 먹었는지 몰랐어. 그거 고쳐주려고 엄마가 얼마나 애쓰셨을지 그려졌어요. 엄마는 그거 말고도 신경 쓰고 살 일이 정말 많았을 텐데.... 고마워요. 엄마. 사실 나는 6학년 때 친구들은 수영복 입고 나만 사복 입고 모자 쓰고 찍었던 단체 사진 속의 나만 기억하고 엄마를 원망하고 미워했어요. 엄마의 사랑으로 지금의 나는 볕을 쐬고 싶을 때 마음껏 쐬고 얼굴에 흰 반점 없이 살아가네요.      


사람은 누구에게나 가리고 싶은 기억이나 외상이 있다. 나는 엄마의 반점을 보며 한 번도 엄마의 마음이 어땠을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태어났을 때부터 엄마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그런 것처럼 내 과거는 엄마의 반점 같은 거라 바라보기로 했다. 마음껏 미워하지도 못할 이유라 답답했고, 원망하자니 죄책감에 사로잡혔던 내 과거가 이제 맑게 개인다. 이제 현재를 살아가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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