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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라봄 Sep 24. 2023

아들과 걷는 황톳길

내 안에 덜 자란 아이와 함께

평온하고 싶은 주말이었다. 다음 주 큰아이는 첫 시험을 앞두고 있다. 내일부터 두 과목씩, 시험 범위도 적었다. 11시쯤 일어나 밥도 안 먹고 게임하는 아들을 보고 있자니 복장이 터지는 거 같았다. '언젠가 하겠지'라는 믿음은 너무 얇았는지 깊은 마음의 소리가 아이를 향해 쏟아져 나왔다.

"공부는 안 해? 언제 하려고!!"


내 말에 반응하는 둘째 아이다. 거실에 개어 놓은 빨래를 자기 방에 얼른 갖다 놓았다. 묻지도 않았는데 자기는 점심 먹고 숙제를 할 거라 말한다. 둘째는 나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 눈치껏 행동하는 아이가 어린 시절 나를 보는 거 같았다. 아이는 대뜸 내가 좋아하는 그곳에 가자고 했다. 우리 동네 황톳길이다.


평소 맨발로 걸으면 발바닥이 아파 신발을 신고 벗기를 반복했던 아이는 오늘은 처음부터 신발을 한쪽에 벗어두고 걸었다. 엄마의 마음 풀어주기를 맘이라도 먹은 듯 말이다. 걷다 보면 지름길처럼 둘레를 돌지 않고 위로 올라가는 길도 있었는데 맨발이라 그런지 그 위로 가자고 보채지도 않았다. 아이가 오늘따라 크게 느껴졌다.

투투투둑 툭 툭 툭

상수리나무에서 바람이 불면 열매가 떨어졌다. 맞을세라 아이는 요리조리 피해 본다.

"엄마 어제 여기 왔었잖아. 나는 상수리나무의 열매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바람이 불어 떨어지는 저 아이는 어디로 떨어질지도 모르는데 겁내하지 않잖아. 얼마나 자유로울까. 더 오래 매달려 있으려고 저항 하나 없이 자연스럽잖아."

갑작스러운 내 말에 아이는 화제를 돌렸다. 엄마 말이 길어지면 잔소리나 훈계로 이어질까 봐 그랬을까?

다시 걷다 아이는 날아가고 싶다고 했다. 그때 얼마 전 보았던 <무빙>이 생각났다. 우리의 화제는 자연스레 초능력이 되었다. 아이는 내게 물었다. 엄마는 어떤 초능력이 있으면 좋겠냐고.

"엄마는 시간을 초월하는 능력을 갖고 싶어. 어떤 시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6학년때로 돌아갈 거야."

왜냐는 물음에 이어 말했다.

"엄마 6학년때 학교에서 반 친구들과 실외수영장으로 소풍을 갔거든. 그때 엄마는 같이 놀지 못하고 그늘에 앉아 있었어. 친구들이 노는 걸 바라보았고 단체사진도 엄마만 사복을 입고 찍었어. 그때로 돌아가서 풀장 안에 들어가 맘껏 놀고 싶어."

말하는 동안 내 몸은 물속에 들어가 헤엄치는 듯했다. 잠시나마 이어진 상상에 마음 상쾌해졌다.


우린 어깨동무를 하며 걸었다.

"오왼오왼, 발 바꿔서 왼오왼오."

나의 군대식 말투와 발을 세차게 뛰어가며 발바꿈을 하는 내 모습이 그냥 웃겼다. 까르르 웃었다. 웃음이 났다.


아이는 황톳길을 다 걷고 편의점에 가서 맛있는 걸 사달라더니 마음뀌었는지 "그냥 엄마 카페로 가자." 고 했다. 엄마 카페는 우리 집이다. 집에 가서 엄마가 해주는 음료를 먹겠다는 뜻이다. 오늘따라 누가 애인지 어른인지 모르겠다. 내 안에 덜 자란 아이와 내 아이와 함께 걸었다. 내 안에 아이는 조금 자란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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