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은 하루
예전에는 집에 들어오면 거실은 물론 모든 방의 전등부터 켰다. 어두운 방을 무척 싫어했다. 빈방에도 불이 켜져 있어야 안심이 되었다. 그러다가 삼십 대 초반에 영국 리버풀에서 연수를 하면서 스탠드 불빛을 경험하고 따라 하게 되었다. 리버풀의 겨울은 춥고, 밤은 길고 깊었다. 한 대학의 게스트 하우스에 머물렀는데, 대부분의 유럽 나라가 그렇듯이 방과 거실에 천장 조명이 없었다. 대신 책상과 침대 옆에 살구색 빛을 내는 스탠드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처음에는 어둑한 방안이 싫어서 욕실과 부엌 전등을 켜고, 티브이까지 켜서 방을 조금이라도 밝히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일주일쯤 형광등 없이 살아보니 희미하고 고요한 스탠드 불빛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그 방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은 느낌이 들었다.
귀국하자마자 까사미아 매장으로 가서 아이보리 패브릭 전등갓이 달린, 당시로서는 꽤나 비싼 스탠드 두 개를 구입했다. 그때부터 밤이 되면 천장 형광등을 켜는 대신 스탠드를 켜기 시작했던 것 같다. 간접 조명기구에 익숙해지자 방마다 병원 수술실처럼 환하지 않으면 불안하던 어떤 마음이 천천히 사그라들었다.
외출할 때 거실 쪽 장 스탠드 하나를 일부러 켜 두고 나간다. 집으로 오는 저녁, 우리 집 베란다에서 새어 나오는 오렌지 불빛이 밤바다의 등대처럼 보이는 것이 좋다. 등대의 불빛은 별거 아닌 채 또 하루를 살아낸 나를 안심시킨다.
어릴 때 외갓집에서 엄마와 떨어져 얼마간 살았다. 일곱 살이나 되었을 때쯤 기억인데, 여전히 생생하다. 저녁을 먹고 사촌들과 툇마루에 앉아서 언덕 아래로 달리는 야간열차를 구경하곤 했다. 외갓집에서 할 수 있는 여름밤의 엔터테인먼트였다. 불빛으로 환한 차창으로 승객들의 얼굴이 쓱쓱 지나갔다. ‘엄마가 저 기차를 타고 올 거야’ 어쩌면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엄마가 왔을 때 외갓집의 불이 꺼져 있으면 실망할 것 같았는데 그런 마음을 모르는 할머니는 벌레 든다고 마루와 방들의 불을 끄라고 성화였다. 어릴 적 외갓집으로 돌아가 어여쁜 살구 색 스탠드 하나 툇마루에 밝혀 두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