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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오도 Dec 05. 2022

남편의 코끝이 내려갈 때

브런치 대신 평양냉면

일요일 늦은 아침 남편과 브런치를 먹으러 가게 되었다. 열흘 동안 휴가를 나왔던 아들이 금요일 복귀했고, 어쩐지 홀가분(?)해져서 일산이나 파주로 가서 브런치를 먹고, 나는 스티븐 킹의 신작 ‘빌리 서머스, 남편은 김훈의 ‘얼빈 읽기로 했다.


그런데 샤워하고 옷을 차려입으려니 살짝 귀찮아졌다. “그냥 동네에서 빵을 사다가 커피를 내려 마시면 어때? 집에 토마토도 있으니까 곁들여서” 남편은 내 제안에 시큰둥하다. “그건 좋은데 누가 사 올 건데? “ 어??? 그야 당연히 당신이지?” 남편은 왜 그게 당연하냐는 눈치다. 남편은 엉덩이가 가벼워서 뭐 먹을까 하는 동시에 사러 갈 채비를 완료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오늘은 좀 귀찮은가 보다.


나는 그럼 가위바위보로 진 사람이 나갔다 오자고 했다. 가위바위보는 두 번 이기는 사람이 이기는 걸로 룰을 정했다. 룰을 정하지 않으면 삼세판이었다느니, 삼판 이승이었다느니 싸우기 때문이다. 가위바위보를 했는데 연이어 내가 두 번다 졌다. 나는 어이가 없어, 다시 하자고 졸랐고, 겨우 기회를 얻었는데 이번에도 연달아 두 번이나 졌다.


남편은 한국이 월드컵 16강에 진출했을 때 보다 더 좋아했지만, 나는 곧바로 결과에 승복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혼자 나 가서 커피와 빵을 사 오는 일은 너무 귀찮다. 내가 질 줄 몰랐다, 더 한 것도 불복하는 세상인데 가위바위보 승패 불복 정도는 괜찮지 않냐는 이상한 논리였다. 나의 당당함에 남편은 당황하며 금세 어쩔 도리는 없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불복 선언과 동시에 당초 계획대로 일산 호수공원 쪽 카페를 제안했다. 얼마 전 동네 지인들과 갔던 백석역 근처에 고로라는 카페가 생각났다. 우리가 그곳에 갔던 날, 마침 비가 억수같이 내렸는데, 음악도 좋고, 뜨거운 커피에 먹었던 빵도 맛있었다. 바삭 소리 날 정도로 얇은 도우에 치즈와 시금치가 올려져 있던 피자도 기억났다. 나는 승부에 불복했지만, 좋은 대안을 제시함으로써 비겁함을 좀 만회할 수 있었다.


우리가 이렇게 우왕좌왕하는 사이 어느덧 시간이 정오를 넘어가고 있었다. 운전대를 잡은 남편이 심각한 얼굴로, 이제 브런치를 할 시간이 아니라 밥을 먹고 커피를 마셔야 할 타이밍이 아니냐며 근본적인 질문을 했다. 나는 내심 동의가 안 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미 비가 억수같이 내리던 날, 고로에서 마셨던 그 진한 커피와 빵에 꽂혀 있었으므로 다소 목소리를 높여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힐끗 남편의 옆얼굴을 보니 코가 조금 더 아래로 내려간 듯 보였다. 남편의 코끝은 언제부터 심리에 영향을 받는다. 화가 나면 평소보다 조금 더 아래로 쳐진다. 내 코는 남편처럼 높지 않아서 세월과 함께 쳐질 일도 없으니 정말 다행이야, 라는 생각을  하는 사이, 내 핸드폰의 내비게이션이 백석역을 지나면서 정신 줄을 놓고 이길 저길 이상하게 안내했다. 결국 남편이 차를 잠시 세웠고, 자동차 내비게이션을 다시 찍으며 꿍하고 소리를 냈다. 그의 코끝이 그만큼 또 아래로 쳐졌다. 나는 좀 의기소침해져서 가만히 있었다.


차가 마침내 고로 카페 앞에 멈춰 섰는데, 아 풍경이 심상치가 않았다. 클로즈드. 문 앞에 영어로 쓴 푯말이 달랑달랑 흔들리고 있었다. “아 그러네.. 카페 사장님도 일요일에는 마땅히 쉬셔야지. 아무렴 쉴 권리기 있지. 그렇지?” 긴급히 둘러대며 남편의 코끝을 살폈는데, 포기가 빠른 그는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빠르게 맛집, 브런치, 일산 이런 문장을 핸드폰에 쓰더니 호수 공원 앞에 ‘더 테이블’이라는 브런치 카페를 찾아냈다. 나는 두말없이 좋은 곳 같다고 동의했다.


근처에 도착하여, 브런치 먹고 책을 읽을 예정이므로 주차요금을 생각할 때 공영주차장에 차를 세우는 것이 좋겠다는 점에 대해 얘기했고, 이 점에 대해서는 우리는 쉽게 합의를 보았다. 마두 옆 앞 제1 공영 주차장에 빈자리가 없어 제2공영 주차장까지 몇 블록 더 가서 차를 세우고 내비게이션이 가리켰던 건물까지 걸었다. 10분 정도 걸었는데 집에서 생각했던 것보다 바람이 차가웠다. 코트 속에 원피스를 입은 탓에 치마 속으로 찬바람이 몰아쳐 오도독 소름이 돋았다. 나는 춥다는 말도 못 하고 빨리 ‘더 테이블로’에 가서 라테 한잔에 크로와상을 베어 불고 싶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난관을 뚫고 찾아 간 ‘ 더 테이블’은 없었다. 창업하자마자 폐업하기 일쑤인 자영업의 현실을 생각하면 놀랄 일도 아니었다. 어디 가기 전에, 일요일에 영업을 하는지, 그 자리에서 영업을 ‘오늘도’ 하고 있는지 꼭 확인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더 테이블이 있던 자리에는 평양냉면 전문점이 있었는데, 고양시와 무슨 관광협회에서 추천된 맛집이라는 철판 안내문이 입구에 붙어 있었다.


아침부터 브런치 먹겠다고 옥신각신하다가 일산까지 왔는데 결국은 평양냉면 전문점 앞에 서 있는 중년 부부. 갑자기 둘 다 웃음보가 터졌다. 나는 하하하, 남편은 껄껄껄 웃었다. 문 앞에 있는 메뉴판을 보니 어복쟁반도 있고 곰탕도 있고, 쟁반 평양냉면이란 먹어 보지 못한 메뉴도 눈에 띄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계획에 없던 곰탕과 쟁반 평양냉면을 주문하고 앉아서 따끈한 메밀 육수를 들이켜고 있었다. 다음부터 브런치 카페는 우리가 아는 곳으로만 가자. 그래 화정에 있는 라이크 라이크 아니면 러스틱. 그게 최고야. 새로운 곳 찾기 없기, 이런 다짐을 하면서.


남편은 곰탕 국물을 몇 숟가락 떠먹더니 사실은 곰탕을 먹게 되어 좋다며 내려갔던 코끝을 다시 올리며 좋아했다. 내가 주문 한 쟁반 평양냉면은 17,000원이나 했지만 삶아서 차게 식힌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를 식초에 절인 무와 오이, 탱탱한 메밀 면에 싸서, 심심한 육수를 곁들여 먹었더니 입맛에 꼭 맞았다.


햇살은 좋았지만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이었다. 얼결에 냉면을 먹고 나니 겨울바람이 더 춥게 느껴졌다. 몇 블록 떨어진 주차장까지 걷는데 오돌오돌 몸이 떨려서 남편이랑 팔짱을 꽉 끼고 딱 붙어 걸었다.


어느덧 시간이 오후 2시였다. 우리는 커피와 치즈 케이크를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커피와 치즈 케이크를 옆에 놓고 해가 완전히 떨어져서 베란다 밖의 나무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을 때까지 각자 책을 읽고 조금씩 졸기도 했다. 일요일이 그렇게 저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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