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스북 친구인 A가 엄마의 장례식을 마치고 이별의 슬픔에 대해 쓰면서 그 슬픔을 '살면서 한 번도 느껴 본 적이 없는 슬픔'이라고 표현했다. 나는 그것이 어떤 슬픔인지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엄마가 돌아가신 지 어느덧 12년이 되어 가는데, 그 ‘살면서 한 번도 느껴 본 적이 없는 슬픔’은 여전히 내 안에 깊게 자리 잡고 있다. 그 세월만큼, 눈물이 빠져나간 만큼, 통증이 빠져나간 만큼, 슬픔의 농도는 더 진해지는 것만 같다.
엄마 살아계실 때 더 많은 시간을 같이 하지 못한 후회의 마음이 슬프고, 무엇보다 한없이 그립고, 보고 싶은 마음이 부르는 슬픔이다. 내 이름을 부르던 엄마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그립고, 나란히 앉아 밤참을 먹던 시간들이 그립고, 더 먼 기억들, 일테면 무서워서 이불을 쓰고 앉아 브라운관 티브이로 ‘전설의 고향'을 보던, 오래전 기억 속 엄마가 그립다. 엄마가 아파서 가장 힘든 시간을 보낼 때 엄마 옆에 있지 않았던 나의 죄는 영원히 씻지 못할 것이다. 돌아가신 엄마를 생각하면, 낯선 곳에서 엄마 손을 놓쳐버린 아이 같은 심정이 된다. 아픈 엄마가 나를 기다리는 동안 얼마나 애타게 내 손을 그리워했을지 세월이 갈수록 절실히 알겠다. 엄마의 마음을 그때는 왜 조금 더 헤아리지 못했을까. 이기적인 딸은 엄마를 그렇게 보내고 말았다.
내가 초등학생 때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엄마가 할머니의 부고를 듣고 통곡을 하던 모습을 기억하고, 한편으로 내가 엄마의 우는 모습을 낯설게 바라보던 장면이 기억난다. 할머니가 오래 아프셨고, 고령이셨기에 어린 내게 할머니의 죽음은 자연스러운 일처럼 느껴졌던 것 같다. 할머니와 정 붙일 시간이 없어서 그랬는지, 내가 원래 냉정한 성정인지 모르겠지만, 할머니의 임종 소식을 듣고도 슬픈 마음보다 낯선 느낌이 들었다.
그날 아침, 아마도 주말이었던 것 같은데, 나는 엄마의 통곡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그 새벽. 꿈에 할머니가 내게 찾아왔었다. 할머니 꿈을 꾼 것은 그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아니었을까 싶다. 나와 할머니와 엄마는 보름달이 환하게 비추는 뒷동산에 올라가 있었고, 얼굴을 알 수 없는 여자들과 함께 강강술래를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달빛이 여자들 얼굴에 쏟아져 환했고, 서로의 손을 잡고 달처럼 둥글게 돌면서 팔락팔락 치맛자락을 날리고 있던 순간에 엄마의 울음소리에 화들짝 놀라 깨어났었다. 엄마가 막 전화로 부고 소식을 전해 듣고 울음을 터트렸던 순간이었다. 엄마에게 할머니의 꿈 얘기는 평생 하지 못했는데, 할머니가 임종 전에 내 꿈에 찾아오셨다고 혼자서 조용히 믿으며 살았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에 그 꿈 얘기를 해드리지 않은 걸 후회했다. 그랬다면, 엄마의 슬픔을 위로하고 엄마의 슬픔에 대하여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있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그 슬픔이 어떤 것인지 내가 조금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었을 테고, 그랬다면, 엄마가 돌아가신 후에 뻔히 후회할 일들을 조금은 줄이지 않았을까. 누구도 생로병사를 피해 갈 수 없다는 명백한 사실은 그 명백함 때문에 무시되는 것일까.
아들과 저녁을 먹으며 물었다. 아들, 엄마가 죽으면 얼마나 슬플 것 같아? 생각해 본 적은 있어? 아들은 귀찮은 눈빛으로 건성건성 대답했다.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무척 슬플 것 같아. 마지못해 대답하면서도 눈은 손에 든 핸드폰에 가 있었다. 엄마도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는 할머니가 죽어서 사라질 거라는 생각을 해보지 못했어. 엄마 부재의 슬픔이 무엇인지 몰랐다. 이런 생각을 하는데, 주책없게 눈물이 핑 돌아서, 얼른 표정을 바꿔 그냥 싱거운 말 해봤다고 하며 대화를 마쳤다.
언젠가 내가 죽은 후에 아들은 문득 오늘 내가 했던 말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낯선 슬픔 앞에서, 그것이 어떤 슬픔인지도 모른 채 세월을 보내다가, 어느 순간 문득 알게 되는 순간이 되면, 엄마가 왜 그때 그런 말을 했는지 이제야 알겠어, 엄마, 하고 조용히 읊조릴지도. 나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