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조연이었을까?
'언니 둘과 남동생이 있는 셋째 딸입니다.'라는 소개를 하면 돌아오는 반응은 대개 비슷하다. "남동생 낳으려고 딸 셋을 낳으셨구나?" 그러면 나는 담담한 척 이렇게 답하곤 한다. "응 꼭 그런 건 아니고, 낳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네." 거기서 끝나지 않고 한 술 더 떠서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 그때는 아들을 하나쯤 낳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때였지." 이 대목에서 나는 오래전 내게 들렸던 그 음성을 다시 한번 듣는다.
'당신의 역할은 셋째 딸이라는 조연입니다.'라는 음성.
나는 정말 조연이었을까? 어렸을 때, 아빠가 해외출장에서 돌아오는 날이었다. 나는 내심 곧 받게 될 선물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아빠는 미안한 얼굴로 말하셨다. "이번에는 일정이 빠듯해서 아무것도 못 사 왔네." 하지만 그날 밤 내가 본 것은 동생이 몰래 숨겨 놓은 멋진 시계들이었다. 그것도 몇 개씩이나 되었다. 나는 당장 그 시계를 잡아채고 아빠에게로 갔다. 아빠는 일찍 잠잘 채비를 마치고 침대에 누으려던 차였다.
"아빠. 왜 거짓말했어요? 왜 남동생에게만 선물을 사준 거예요?"
"막내고 남자잖아. 어쩌겠어."
당황한 아빠에게 돌아온 답이었다. 그 답을 듣는 순간 깨달았다. 이 싸움에서 나는 결코 승리할 수 없음을. 대신 나는 억울함을 감추는 편을 선택했다. '어쩔 수 없다'는 그 말이 서운함을 넘어서 단단한 벽이 되었다. 그 벽은 아빠와 나 사이를 굳건하게 가로막고 있었다. 그 벽은 커가면서 낮아지기도 하고 또 때로는 높아지기도 했다. 그 벽 사이로 대화도 오가고 종종 진심과 감사도 전해졌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의 '조연'이라는 그 생각은 사라지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상황이 바뀌면 내가 주연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B라는 친구는 첫 아이를 키우면서 힘들었던 시간을 고백했다. 그녀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육아의 어려움이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의 사랑스러운 아이를 바라보며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고 자신이 항상 부모의 사랑에 배고파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녀는 긴 세월 동안 한 번도 마주하지 못한 엄마에 대한 미움과 원망의 감정으로 주체할 수 없었다고 한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결혼을 했지만 나는 여전히 그 셋째 딸로서의 '조연'역할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 곳에서는 나는 '아내'와 '엄마'라는 조연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상대방의 기분을 살피느라 늘 피곤했다. 그러나 아이를 키우며 나는 깨달았다. 나는 내 아이가 결코 누군가의 조연으로 살아가기를 원치 않는다. 당당히 자신의 삶에 주인공이 되기를 기도한다. 나의 부모님은 어땠을까? 당신들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그동안 스스로 셋째 딸이라는 틀을 내게 씌웠던 걸까?
최근에 아빠가 술 한잔 하고는 아빠 어린 시절 이야기를 꺼냈다. 부족한 월급으로 할머니가 아들 넷을 키우던 시절 이야기였다. 어쩔 수 없었을 테지만, 그중 둘째 아들로 태어난 아빠는 형편이 어려워 혼자 외갓집에 맡겨져 키워진 적이 있다. 매번 학교 회비를 밀려서 학교 가기가 죽기보다 싫었고 도시락도 형편없어 점심시간만 되면 도망가기 일쑤였단다. 장남과 달리 유독 고생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할머니를 많이 원망했다고 하셨다. 지금 지극히 효자인 둘째 아들, 우리 아빠도 당신 엄마를 오랫동안 원망하고 살았던 것은 아닐까. 나는 갑작스레 아빠를 이해하고 싶어 졌다. 내가 느낀 감정의 몇 배를 느꼈을지도 모르는 한 꼬마 아이에게 한없는 연민이 느껴졌다. 그 꼬마 아이는 결국 사회에서 성공을 이루고 가정을 일구었지만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상처를 가족에게 드러냈을 것이다. 우리는 상황이 바뀌더라도 결국 우리 모두의 상처를 내보이기 마련이다. 특히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는 숨길 수가 없다.
가족이 왜 그래.
가족은 어떤 존재일까? 가족은 가장 가까운 대상으로부터 가장 사랑받고 싶은 곳이다. 하지만 내가 항상 주인공이 될 수는 없다는 진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첫 장소이기도 하다. 사실 가족 안에는 누구나 주연이고 누구나 조연이다. 그 역할을 서로 주고받으며 우리는 사랑하고 또 상처 받는다.
아이를 낳고 나는 깜짝 놀랐다. 나는 제 때 먹을 수도 충분히 잘 수도 나 혼자만의 시간을 즐길 수도 없었다. 여기서 나는 사라지고 아이만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완벽한 조연이 될 때만 느낄 수 있는 조화로움과 감동 말이다. 내가 감수하는 희생으로 아이는 자라고 있었다. 그리고 이 아이에게도 언젠가는 누군가의 조연이 되어야 할 때가 올 것이다.
우리가 늘 주연이 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내가 원하기만 한다면 언제나 우리는 내 삶에서만큼은 주인공이다. 앞으로도 내가 어려서 느꼈던 그 감정들, 때때로 올라오는 억울함은 계속될지 모른다. 보다 더 완벽하게 사랑받을 수 있었다는 생각으로 누군가를 원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만약 그런 선택을 거듭한다면 나는 내 인생을 조연으로 살 수밖에 없음을. 누군가가 짜 놓은 극에 나는 조연의 역할에 충실하고 있을 것이다. 난 이제 누군가가 뱉은 말이나 누군가에 의한 섣부른 판단으로 흔들리고 싶지 않다. 무수히 내 마음을 흔드는 세상에서 나는 꿋꿋이 내가 언제나 주연임을 잊지 않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