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도 보온이 되나요?

아빠가 보내온 사진이 말을 했다.

by 민지울

얼마 전 아빠가 가족 단체 채팅방에 사진 한 장을 올렸다. '등산을 좋아하는 아빠니 풍경사진이겠지.' 싶었는데 사진 속엔 왠 두 명의 귀여운 꼬마들이 있었다. 수영복을 입은 5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와 2돌쯤 되어 보이는 아기였다. 처음에는 조카인가 싶어 보았는데 두 살배기 아이가 담겨 있는 목욕통이 예삿것이 아니다. 옛 추억 속에나 볼 수 있는 그 시절의 튼튼한 '갈색 대야'였다. 자세히 보니 사진 속 짓궂은 아이는 ‘나’이고 갈색 대야 안에서 유유자적인 아이는 ‘내 남동생’인 것이다. 엄마가 덧붙인 설명에 의하면 사진 정리를 하던 아빠가 우연히 발견한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사진을 보낸 당사자는 아무 말도 없다. 아빠를 제외한 우리만 ‘이게 누구냐’, ‘생각보다 귀여웠다;, '전혀 누군지 몰라봤다"는 등 한바탕 난리다. 결국 자연스레 다른 화제로 전환하며 추억 속 두 아이는 다시 묻히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아빠가 말없이 건넨 사진 한 장으로 내 마음속 빈칸 하나를 채울 수 있었다. 빛 바래가는 사진 속 두 꼬마를 기억하고 싶은 아빠의 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내가 기억하는 아빠는 결코 자상한 스타일은 아니었다. 어릴 적 내 눈에 비친 엄마는 육아와 살림에 지쳐 늘 여유가 없었고 그런 엄마와 관심에 목마른 우리들보다 바깥일에 시간과 마음을 쏟는 아빠를 원망했다. 소심한 나는 그 원망을 '거리감'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지만...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아빠도 점점 변해갔다. '우리와는 다른 세계'에 있어야 할 것 같던 사람이 '우리가 있는 그 세계'로 온 그런 느낌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가 내가 재단했던 것만큼 강철 같지도, 무뚝뚝하지도 않았다는 점이다. 그런 '나와 같은' 아빠에게 요즘은 괜스레 한마디라도 더 붙이곤 한다.






변하지 않을 것 같던 아빠도 변했을 만큼 세월은 흘렀고, 세상은 늘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 변화로 오늘을 갱신하는 중이지만 막상 각자 집안의 사정은 그때와 별반 차이가 없다는 사실이 놀랍다. 아무리 가전기기가 좋아졌다고 해도 엄마들의 할 일은 끝이 없고, 아무리 쉬는 날이 보장된다고 해도 그만큼 높아져가는 물가와 교육 수준에 발맞추기 위해 아빠들의 일은 끝이 없다.


30년도 더 전에 내가 그랬듯, 내 아이도 종일 엄마와의 놀이를 기다리고 아빠의 퇴근만을 기다린다. 아이들에게는 엄마, 아빠가 하는 ‘중대한 일’이 보이지 않는다. 다만 아빠와 엄마의 존재만 보인다. 아이는 함께 하는 즐거움만으로도 마음을 한가득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가 아빠가 보내준 사진 속의 한 아이를 가리키며 하는 말

"나네?"

그때서야 사진 속 어릴 때 나의 모습이 꼭 아이의 모습과 닮았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아이에게 시간을 온전히 내지 못해도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을 의심해본 적이 있던가?

그렇다면 사진 속 그 아이를 향한 아빠의 사랑을 어찌 의심할 수 있을까?

세상으로부터 울타리를 지켜내느라 늘 함께하지는 못해도, 아빠 마음속에는 무한한 애정이 언제나 보온 중이었다.






내가 매일 하는 하루 일과의 마지막 의식이 있다.

곤히 잠든 아이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내려온 이불을 가슴 위까지 덮어준다. 그리곤 말한다.

"오늘 엄마가 더 사랑해주지 못해 미안해."


아빠도 언제나 우리에게 사과하고 있지 않았을까?

늦게 퇴근해서 잠든 우리의 얼굴을 보면서, 참석하지 못한 입학식 사진을 보면서, 결혼식 날 사윗감에게 딸을 넘겨주고 나서 남모르게 우리에게 늘 미안해하지 않았을까?


옛 사진을 올린 뒤에 왔어야 할 떨리는 아빠 마음을 내가 완성해본다.

"그때 더 사랑해주지 못해 미안해."






내가 아이를 키우면서 확실히 알게 된 것은 우리 모두는 사랑할 줄 아는 존재라는 것이다.

자라온 환경이나 지금 처한 상황 때문에 그 사랑을 표현하기엔 부족할지언정 우리 모두에겐 언제나 사랑하는 이들이 필요한 만큼의 사랑이 보온되고 있다. 앞으로 얼마나 더, 수많은 사람들이 내게 준 가슴 절절한 사랑을 느끼며 마음이 매여야 할지 모르겠다. 그것을 기억하며 보온중인 사랑을 아낌없이 퍼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내가 아는 한 사랑은 퍼줄수록 더 넘쳐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