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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정윤 Mar 03. 2024

대한민국이 '대한서울'이 되지않으려면

트렌드 코리아 (9) 리퀴드 폴리탄

<트렌드 코리아>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 있는데, 바로 "10대 상품" 코너이다.

소비트렌드분석센터에서는 매년 전국 범위의 설문조사를 실시하여 그해의 ‘10대 상품’을 선정한다. 단순히 많이 팔린 제품이 아니라 전 국민에게 크게 사랑받거나 화제가 된 것, 시장에 큰 영향을 준 것으로 선정하는데 여기에는 상품·서비스·제도가 모두 포함된다.


지난해 10대 상품에 무인점포, 웹툰·웹소설, 팝업스토어 등 시장을 뜨겁게 달군 이슈들이 포함됐다. 그런데 특히 눈길을 끈 것은 ‘고향사랑기부제’였다. 고향사랑 기부제란, 실제 태어난 곳이 아니더라도 현재 거주지를 제외한 지방자치단체에 기부금을 낼 수 있는 제도인데 해당 금액만큼 세액공제를 받을 수 있고 무엇보다 각 지역 특색이 반영된 답례품까지 받을 수 있어 전국민의 관심이 높았다. 이러한 제도는 지방 소멸 위기 속에 거주민 외에도 지역과 여러 형태로 관계를 맺는 ‘관계인구’를 유치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오랫동안 인구 개념으로 인식돼 온 ‘주민등록인구’ 및 ‘정주인구’ 대신 '관계인구', 혹은 특정 지역에서 시간을 보내는 ‘생활인구’ 개념이 자리 잡고 있다. 도시와 도시에 사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관점이 변화한다는 뜻이다.

앞으로 우리의 도시는 인구수나 행정구역처럼 고정된 특성이 아니라 ‘사람들이 얼마나·어떻게 시간을 보내는지’ ‘해당 지역에 돈이 흘러 들어오는지’ 등 유동적 흐름이 중요해진다. 도시의 변모를 나타내는 트렌드 용어 리퀴드 폴리탄’은 이러한 의미를 담고 있다. 

 



리퀴드 폴리탄이 되는 것은 그렇게 돼야만 도시가 살아남을 수 있다는 당위적 변화인 동시에, 몇 가지 시대 변화와 엮인 거시적 트렌드이기도 하다. 그 몇 가지 요인이란 첫째, 유동성을 높이는 제반환경으로 이동수단이 발달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역 간 이동을 하고 싶어도 시간과 비용이 크게 소요됐던 과거와 달리 고속철도·저가항공의 보편화로 이동시간이 단축된 것은 물론 공유 차량·공유 자전거·공유 킥보드 등 대중교통으로 채우지 못하는 ‘라스트 마일’의 연결성이 강화되면서 이동을 보다 편리하게 만들고 있다.



물리적 환경의 변화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시간을 구속하는 제도도 유연해지고 있다. 2000년대부터 점차 주당 근로시간을 줄여 가면서 ‘워라밸’이라는 가치가 사회 전반에 자리 잡았다. 또한 대한민국 산업구조가 제조업 기반의 산업구조에서 탈피해 서비스, 정보기술(IT) 기반의 산업이 성장하면서 일률적인 출퇴근시간에 제한받지 않는 새로운 직종의 사람도 증가했다. 예기치 못했던 팬데믹 이후 원격근무와 유연근무제 등 시간을 유연하게 활용하는 제도도 현실화하고 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사람들이 시공간을 소비하는 방식이 변화했다는 점이다. 오랫동안 일과 여가의 이분법 속에 일하는 시간이 아닌 여가시간 그 자체의 절대적 확보가 중요했다면 이제는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에 관심이 많다. ‘경험’이 중요해지는 것이다. 일상에 새로움을 불어넣기 위해 틈틈이 여행을 떠나고 특별한 체험을 할 수 있는 팝업공간을 열심히 찾아다닌다. 그만한 경험을 얻을 수 있다면 기꺼이 불편하고 먼 곳도 찾아가겠다는 사람이 많아졌다. 

동아일보의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MZ세대 응답자 10명 중 8명은 가고 싶은 가게가 일주일에 사흘만 문을 열더라도 일정을 맞춰서 ‘가겠다’고 답하였고 10명 중 9명은 ‘엘리베이터가 없거나 교통이 불편하거나 멀어도 가겠다’고 답했다.


참고기사: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20/0003407630?sid=101


리퀴드 폴리탄이 성장할 수 있는 조건은 갖춰졌다. 그런데 사람들의 이동성이 증가한다고 지방이 유리해지는 것은 아니다. 이동이 늘어날수록 소위 대도시의 ‘빨대효과’로 인해 오히려 지역은 위기에 처할 수 있다. 이동이 쉬워진 만큼 주변 지역에서 의료·교육 등 중요한 요구를 해결하기 위해 대도시를 찾아오는 것이다. 각 지역은 사람들을 끌어모을 만한 인력(引力)까지 갖춰야 진정한 리퀴드 폴리탄으로 거듭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리퀴드 폴리탄이 만들어질까?


   



첫 번째는 그 도시·동네만이 가진 시그니처가 필요하다. 시그니처는 단순히 ‘상징물’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곳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콘텐츠’를 지칭한다. 예를 들어 강원도 양양이 청년층 사이에서 ‘힙한’ 도시로 거듭나게 된 시작점에는 ‘서피비치’가 있다. 서퍼들이 이용할 수 있는 시설이 생긴 뒤 서핑강습, 비치파티를 열기 시작했는데 간간이 서핑하는 사람들만 찾던 양양해변을 서핑의 성지로 거듭나게 했다. 현재는 서핑을 즐기지 않는 사람조차 서핑하는 풍경을 즐기고자 찾는 곳이 되면서 방문객 수가 수십만 명에 이른다.



두 번째는 시그니처를 넘어 지역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어떤 시간을 보낼지 경험을 설계하는 게 필요하다. 일본의 지역 도서관 사례는 눈여겨볼 점이 많다. 일본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서관으로 알려진 이시카와 현립도서관은 2022년 개관했는데, 방문객이 개관 5개월 만에 53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외형적으로만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남녀노소 누구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체재형’ 도서관을 지향했기 때문이다. 가령 일부 공간을 제외하고는 자유롭게 커피를 마시며 책을 볼 수도 있고 아이들에게 그림책을 읽어 줄 수도 있다. 놀이터와 접목한 새로운 도서관 공간을 제시하기도 했다. 방문자의 경험을 세심하게 배려한 것은 가구에서도 드러난다. 많은 도서관이 간과하고 있지만 사실 사람들이 시간을 오래 보내기 위해 중요한 책상과 의자에 공을 들인 것이다.


참고 영상: https://youtu.be/2ddpPnzUUDE?si=Y0dJCKdTPMh5RhdD


마지막으로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지속가능한 흐름이 될 수 있도록 지역 생태계가 만들어져야 한다. 최근 쇠락하는 지방의 구도심을 중심으로 다양한 부흥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 지역 주민들이 함께 힘을 모아 생태계를 조성해 나간다. 경북 영주시의 경우 지역 경험의 설계가 하나의 플레이어만으로는 작동하기 어려운 만큼 여러 스타트업을 유치해 새로운 생태계 조성을 시도하고 있다. 유휴 주택을 일주일 살기·한 달 살기 공간으로 바꾸는 숙박 스타트업, ‘영주 알프스 코스’ 등 즐길거리를 발굴해 제공하는 액티비티 스타트업 등이다.



대한민국 인구는 감소세에 접어들었다. 새로운 도시를 짓는 게 중요했던 시절과 달리 서울에만 집중되는 시간과 돈을 전국으로 나누는 것이 필요해졌다. 대규모 도시계획보다 작은 실험으로 도시를 ‘기획’하고 통하는 전략을 찾아가는 ‘택티컬 어버니즘’이 요구된다. ‘대한서울’이 아니라 대한민국으로 남기 위해 지역에 다채로운 색깔을 입힐 시간이다.





본 내용은 필자가 국방일보에서 연재하는  <병영에서 만나는 트렌드>글을 수정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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