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4. 13.
아기와 나 몰래 봄이 이만큼 무르익었다. 작년 이맘때, 배철수와 정유미의 목소리를 들으며 병원에 다녀오면 다행스럽게 하루가 지났고, 아기의 체중과 수유량을 알리는 문자로 또 다른 가슴 떨리는 날을 시작했었다. 멈춰버린 것만 같았던 계절이 한 바퀴를 돌아오는 동안, 여리고 작았던 애기가 이만큼 자랐다.
복동이는 건강하다. 잘 웃고 활발히 움직이며 우리를 조바심 나게 하지 않는다. 오래도록 나를 속상하게 하던 이유식도 한 고비를 지난 듯하여 이제 하루 세끼 식사로 넘어가고 있다. 그러나 캐뉼라를 졸업하려면 다섯 살이 넘도록 기다려야 하는데 그때 가서 하게 될 수술이란 것이 위험하여 단번에 성공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자는 동안에는 잊지만 눈을 뜨는 순간부터 가슴이 아파지는, 도망칠 수 없는 괴로움의 종류가 있었다. 모르고 살았으면 좋았으련만, 근 이삼 년 간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평범해지고 싶어 열심히 살았다. 나보다 더 안 좋은 상황에 처한 사람을 보며 치졸하게 위안을 삼을 때가 있다. 복동이의 생사조차 장담할 수 없을 때를 떠올리고 얼마나 감사한가 되새기며 괴로움을 지워보기도 한다. 그런다 한들, 우리 아기가 엄마하고 불러줄 날이 대체 언제인지 모르는 채로 지내야 한다는 것은 바뀌지 않는 현실이다. 한 조각 위로로 어림없는 우리 셋이서 넘어야 하는 산.
나는 아직까지도 건강히 아기를 낳은 엄마들, 나와 같은 고통을 겪지 않은 이들이 부럽다. 꽃 같아야 할 아기와 우리의 몇 년이 기약 없이 그늘지는 것도 두렵다. 우리의 아픔이 타인에게 안타까움을 자아내는 한편 그들의 삶에 묘한 안도감을 가져다 주려니 하는 뒤틀린 생각도 해본다. 어리석고 소모적인 줄 알면서도 불쑥 떠오르는 이런 잡념들을 어찌해볼 도리가 없어 가끔 움츠러든다.
모두 나름의 짐이 있을 것이고, 고통의 경중을 비교할 수 없으니 내가 제일 힘들다며 징징거리는 사람이 되기 싫었다. 하지만 씩씩하게 살자고 현재 진행형인 힘듦을 부정하는 것도 현명한 방법은 아니지 않은가. 어지러운 살림에 손대기는 어려워도 정돈 후엔 개운해지는 것처럼, 나의 상황과 감정들을 물건처럼 꺼내어 정리해보고 싶었다. 그러니까 내가 어디쯤에 어떤 상태로 서 있는지 몹시 궁금한 자의 자기반성 같은 것이다.
아기가 자는 짬짬이 글을 쓰는 며칠 동안, 만지면 뭉그러질 것 같던 새 잎들은 제법 그늘을 드리울 만큼 자랐다. 연한 빛의 꽃잎들은 자취도 없고, 철쭉과 꽃잔디가 눈부시다. 꾸준하게 흐르는 시간을 따라가는 동안, 예상치 못한 시련과 상실을 겪을 수도 있고, 기적처럼 일이 수월하게 풀릴지도 모른다. 모른다. 아무도 모른다. 손에 잡히는 것은 지금 눈 앞에 있는 것뿐이다. 가끔 쓸쓸해질 때도 있겠지만 어쩌겠는가. 아기 때문이 아니더라도 늘 크고 작은 고민들은 있어 왔다. 완전무결한 행복, 그리고 그것을 지속하는 것은 애당초 어려운 일이다. 알베르토 자코메티 전시장 출구 쪽에 적혀 있던 작가의 말 중 일부를 적어왔다.
만약 인간이 두 번 죽을 수 있다면 세상이 얼마나 더 진지하고 진실해질까라고 상상을 해봅니다.
가령, 한번 죽고 두 번째 삶을 살아가는 인생을 생각해봅시다.
우리는 삶을 에워싼 그 많은 부질없는 것들을 걷어 내버릴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자 자신을 진실하게 바라볼 수 있은 시간을 선물 받은 겁니다. 남의 시선에서 벗어난 시간인 거죠. 그것은 또한 우리 집 앞에 무심히 있던 나무들이 다시 보이고, 내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이는 기적이 일어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난 매일매일 죽고 매일매일 다시 태어나는 환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번 죽고 난 다음엔 지금과 똑같은 일을 반복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일어나서 걸어 나갈 것입니다. 계속 걸어가는 거죠.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지만 그냥 무작정 걸어가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글쎄, 두 번째 사는 삶이라도 내 아기의 아픔이 처음인 듯 애달프겠지만 어쨌거나 부질없는 염려에 드는 품을 줄여 나와 내 사람들에게 더 집중하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니 눈 앞에 보이고 들리고 만져지는 것들이 주는 감흥을 감사하게 취할 것. 좋아하는 일을 꾸준히 궁리하고 실행에 옮기며 일상에 생기를 유지할 것. 사랑하는 마음을 아낌없이 보여줄 것-특히 아가에게. 지금은 이 정도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일 것이다. 마치 자기 계발서에서 발췌한 양 모범적인 이 결론과, 그제 밤 다소 충동적으로 보였을 세계문학전집 결제가 아주 무관하지는 않다는 것을 남편에게 살포시 알리며 길어진 일기를 이제 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