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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칠성상회 Jul 14. 2021

계절이 두 번 바뀌는 동안

복동이가 말을 하기 시작했다.

"여보, 저 밖에 있는 교회를 보니까 우리 묵었던 그 호텔이 생각나네."


폭염경보가 내린 칠월 한 낮, 후덥지근한 언어치료센터 대기실 창 밖으로 보이는 교회탑이 시간을 과거로 되돌려 놓았다.


가로수 잎들이 비에 젖어 보도블록을 빼곡하게 뒤덮던 겨울의 초입, 나와 남편은 종로의 한 호텔에서 일주일 여를 묵었다. 수술을 마친 딸이 잠들어 있을 병원 지붕 한 편의 굴뚝에서, 수증기인지 연기인지 모를 무언가가 폭폭 나오는 모습이 건너다 보이는 숙소였다. 길 건너편에는 트리 전구가 반짝이는 호텔이, 그 옆에는 계절에 어울리는 무거운 적갈색의 교회 건물이 있었다. 딸이 품에 없으니, 할 일도 딱히 없던 며칠을 나는 창가에 앉아 교회를 드나드는 사람들과 한 해를 갈무리하는 가로수, 그리고 병원을 번갈아 보며 흘려보냈었다.


얇아진 다리 탓에 걷지 못하는 딸을 데리고 돌아온 집에서, 트리를 꾸밀 생각도 하지 못했던 지난해의 크리스마스, 그리고 몇 차례의 코로나 검사와 수술장행. 그때쯤에는 나도 수술장 앞에서 울지 않는 꽤나 담대한 엄마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3월을 며칠 앞둔 날, 복동이는 출생 이후 계속 가지고 있던 호흡 유지 장치를 목에서 떼어 냈다. 나는 덜덜 떨면서 아기 목의 서지컬 스틸 체인 고리를 풀었고 주치의 선생님은 망설임 없이 캐뉼라를 쑥 빼냈다. 복동이는 캐뉼라로 목을 가리는 시늉을 하며 한참을 서럽게 울었다. 너무나 만지고 싶던 딸의 매끄러운 뒷 목을 보았다. 한여름 볕에 그을린 것처럼, 체인이 있던 자리만 유달리 하얀 가느다란 목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복동이는 나를 똑! 딱! 이 아닌 '엄마'라고 불렀고, 그다음에는 남편을 '아빠'라고 불렀다. 우리 딸을 네 돌까지 키우는 동안 꿈에서도 듣지 못했던 말이었다. 어느 밤에는 복동이가 엄마를 부르며 잠꼬대를 했다. 깨워서 끌어안고 '오야, 엄마 여깄네.' 하고 궁둥이를 투닥거려주고 싶을 만큼 예쁜 잠꼬대였다. 수시로 빼던 가래 석션을 이제 하지 않아도 되었으므로 우리는 처음으로 물놀이를 가고, 또 처음으로 놀이동산에 갔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 롯데월드에 첫 발을 내디뎠을 때, 어리둥절한 눈으로 배시시 웃던 복동이의 얼굴이 내 마음을 가득 채웠다.


나와 남편은, 이제 복동이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사라질까 봐 기갈 들린 사람들처럼 복동이의 말을 모은다.

"아빠, 딱딱하게 하지 말고 부드럽게 말해요."

"노랑 파프리카는 바나나 같고, 빨강 파프리카는 문어 같네요. 문어가 빨강 스카프를 했나 봐요."
"고기가 날카로운 이빨 같아요."

"로켓 타고 달나라 가서, 외계인이랑 놀 거예요."

"냄비에서 큰 파도소리가 나네요."

"엄마, 좋은 꿈 꿔요, 복동이도 좋은 꿈 꿀게요."

작은 소리로 열심히 만들어내는 복동이의 말들을 소중하게 거두어 되뇌면서, 남편과 나는 아직도 끈덕지게 붙어있는 불안을 툭툭 털어낸다.


복동이가 말을   있게 되었으므로, 나는   반의 휴직을 끝내기로 하고 복직 서류에 사인을 했다. 복직을 결정한  며칠 동안 저녁 설거지를 하며 이런 것들을 생각했다. 이르게 복동이를 만나던 분만장에서의 타는  같던 갈증,  킬로가 되었다는 문자를 받고 기뻐하며 햇반 다섯 개로 아기의 몸무게를 가늠해보던 , 의료진 몰래 말랑하고 촉촉한 발가락을 처음 만져보던 순간의 행복. 응급상황이 벌어진 앰뷸런스 곁에서 고속도로의 차들을 멍하니 보던 날의 무력감, 생명줄을 주렁주렁 매단 복동이를 집에 처음 데려 오던 날의 떨림, 야속하게 너무나  어울리던 돌쟁이의 분홍 안경, 병원 외래를 기점으로 느리게 지나던  간의 시간들,  사이를 메웠던 눈물 같은 것들을.


경제활동에서 오는 부대낌이 배제된 생활을 멈추고, 다시 일터로 돌아가는 일은 두렵기도 하여 솔직한 마음으로 썩 달갑지 않았다. 그러나 다시 내 삶을 살면서, 건강하게 커가는 복동이를 지켜볼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역시 나를 벅차게 한다. 감사 말고는 표현할 길이 없다. 우리 가족은 너무나 감사하게도 이제 제법 평범한 날들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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