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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칠성상회 Jan 11. 2024

좋아하는 것들로 하루를 채웠다.

복동이를 등원시키고 계단 오르기를 시작한다. 첫날처럼 뒷 목이 조여 오는 부끄러운 지경은 면하여 꼭대기까지 두 번을 올라간다. 숨이 몹시 차는 것은 물론, 내려오는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치는 뺨이 거뭇한 기미를 숨길만큼 붉다.


일층에 내려 맨투맨 티셔츠 차림 그대로 문화세탁소 방면 내리막길로 나간다. 살짝 밴 땀이 식는 상쾌함과 수년만에 운동이라는 것을 했다는 뿌듯함. 겨울바람이라는 게 이렇게 시원한 것인가요 하는 으쓱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구름에 달 가듯 아파트 주위를 걷는다.


또다시 일층에서부터 층수를 보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며 꽃기린 화분을 지나 자전거를 거쳐 애니멀프린트 부츠가 누워있는 마지막 층에 도달한다.


포옥 (더) 나이 든 얼굴로 집에 돌아와 생수를 몇 컵 들이키고 아침 샤워를 마친다. 조금 방심하면 너저분해지는 작은 집이라 이리로 저리로 몇 바탕을 움직이고는 시래깃국, 세발나물, 반숙 달걀 두 개를 반찬 삼아 아침을 배불리 먹는다.


설거지를 마치고, 읽던 책 그릿을 펼친다. 이제 자녀의 그릿을 어떻게 길러줄 것인가에 대한 장이라 다소간의 비장함으로 책을 읽어 내려간다. 현관 앞에 어제 플렉스한 책 뭉치들이 도착해 있기에 마음은 책 택배 상자를 휘젓고 있지만 오늘 내 목표는 이 책을 덮는 것.


잠시 후, 책에 대한 투지도 몸의 온기도 금세 식어 꾸물꾸물 가습기를 켜고 복동이 침대로 파고든다. 예측 가능한 수순이다.


한 시간쯤 자고 일어나 밀과 보리로 향한다. 달보드레한 감자수프가 없어 멋 내지 않은 뜨끈한 토마토 수프를 주문하고 자리를 잡는다. 새 책 두 권과 헌책 한 권을 번갈아 뒤적이다가 가끔 고개를 들어 걸어가는 사람과 날아가는 새들을 본다. 산에 하얗게 걸렸던 겨울 햇빛이 일찌감치 사라져 창밖이 푸르스름하게 변하는 것도 지켜본다. 그리고 드디어 읽던 책의 흐름을 타 마지막 장을 덮으며 속으로 외친다. 복동아, 이게 엄마의 그릿이다. 뿌듯한 마음으로 복동에게 줄 초콜릿쿠키를 챙겨 집으로 돌아온다.


이 쿠키 엄마가 만들었어? 아니 엄마가 사 왔어.

아, 잘 사 왔네!


밥만 먹는 밥보에게 간식 잘 샀다는 칭찬을 처음 들었다. 정말 맛있다는 뜻인데 이럴 때조차 이 착한 녀석은 배고프지 않냐며 엄마 한 번, 아빠 한 번을 잊지 않고 챙긴다. 이렇게 잘 먹을 줄 알았으면 두 개를 사서 남편 하나, 아가 하나 줄 것을.


가족을 만나고 오느라 늦어진 밤, 계단 오르기를 하다 병이 생긴 남편을 살피는 사이 엄마를 기다리던 복동은 소르르 잠이 들었다.


깰지도 모르는데 볼에 뽀뽀 세례를 퍼붓고 사랑한다고 한 다음 끄덕이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방문을 닫아 주었다.


오늘은 여느 방학날처럼 평범했지만 욕심과 조바심, 걱정이나 후회 같은 것들이 없었다. 아이처럼 하고 싶은 대로 시간을 보냈다. 사물로 치자면 따뜻한 색의 필름사진 같았던 썩 괜찮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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