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만났을 때
그를 처음 만났을 때엔 나는 마음이 다쳐서 누군가에게 마음을 열 준비가 안 되어있었다.
전 남자친구라고 하기도 뭐 한 짧은 만남을 가진 누군가와의 관계에서 상처를 받았었다.
마음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누군가를 만나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나는 그런 생각을 뒷전으로 한 채 그를 처음 만났다.
처음 만났을 때에 나는 경계심이 많았다.
우리가 사귀기로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같이 걸을 때엔 조금은 떨어진 상태로 걸었고, 대화를 할 때에도 내 마음을 열지 않았었다.
내가 얼마나 마음을 열지 않았나 생각해보니 데이트를 하고 나서 집에 갈 때도 전혀 아쉬워하지 않았다.
그랬던 나와는 달리, 그는 버스가 끊기기 전에 빨리 가라는 나의 말에도 아쉬워하며 발길을 옮겼다.
그리고 함께 걸을 때에도 경계심을 가진 내가 나아질 때까지 나를 이해해주며 자신의 빠른 걸음을 뒤로한 채 나의 걸음에 맞춰주었다.
그런 그의 마음을 언젠가부터 알게 되었고, 그 마음에 고마워하게 되었을 때쯤엔 내 마음도 열려있었다.
그때가 언제쯤이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뒤를 돌아보니 내 마음은 열려있었고, 어느샌가 나도 모르게 매번 헤어짐을 함께 아쉬워하고 있었다.
산책을 좋아하는 나는 그와 함께 있을 때에도 자주 걸었고, 그때마다 함께 손을 잡고 걷는 것이 참 좋았었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에 나는 대학생이었고 주로 학교 주변에서 데이트를 했었는데, 키 차이가 많이 나는 우리를 보고는 많은 사람들이 고목나무에 매미가 붙은 것 같이 귀엽다고 했었다.
매번 남자에게 질질 끌려다니기만 했었고 별 연애다운 연애를 많이 못 해봤던 나는 그와 처음 하는 것들이 많았다.
그와의 연애에서는 항상 내가 더 배려 받고 인정받고 사랑받았었다.
그래서 더 편하게 만나고, 이전보다 더 행복하다고 생각했었다.
실제로 그는 나와 만날 때 특별한 날이 아니어도 소소한 이벤트를 자주 해주었다.
이를테면 내가 좋아하는 립스틱 색을 기억해두었다가 동생이 화장품 사러 갈 때같이 다녀왔다며 뜬금없는 선물을 주었다.
혹은 길을 걷다가 마음에 드는 모자를 발견했는데 한 번 써보라고 머리에 씌워주더니 내가 거울을 보고 있는 사이에 계산을 해서 선물을 했다.
꼭 물질적인 선물이 아니어도 불면증이 있는 내가 잘 잠들 수 있게 매일 밤 통화를 하며 다독여주기도 했다.
본인도 제대로 된 연애를 못해봤다는 그가 나를 생각하며 준비한 도시락은 아직도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원래 요리를 좋아하고 잘하는 그였지만, 그 속에 나를 생각하는 마음이 얼마나 더해져있는지는 도시락을 눈으로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메뉴와 후식으로 3단 도시락을 챙겨온 정성이 그가 도시락 하나를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가를 보여주었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그 도시락만큼은 나쁜 기억으로 두지 못하나 보다.
아무튼 그는 마음을 열지 못하는 나에게 자신의 마음을 조금씩 흘려보내며 내 마음을 조금씩 데워갔다.
그 데워진 마음을 나는 어떻게 흘려보낼까 고민했었고, 나는 그의 가족들을 챙겨주었다.
어린 동생이 있는 그는 그 동생을 참 예뻐했다.
나도 자연스럽게 그 동생을 예뻐하게 되었고, 동생의 생일이나 어린이날엔 아르바이트비를 쪼개어 선물을 했었다.
내 화장품을 살 때에는 그의 어머니께 드릴 화장품도 같이 구매했다.
그래서 그의 막내동생과 어머니는 나를 좋아했다.
나와 그의 가족이 가까워질수록 그를 소개해주었던 장본인인 나의 후배이자 그의 첫째 동생은 나를 더 경계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뒤에서 가족들에게 나를 이간질하려 했었고, 그게 몇 번 들통났었다.
내가 나한테 왜 그러냐고, 이럴 거면 오빠를 왜 소개해 준 거냐고 물었을 때에 돌아온 대답은 본인도 이렇게 질투하게 될 줄 몰랐다며, 오빠를 뺏긴 기분이라고 했다.
처음에는 그런 생각이 들 수도 있겠구나 싶어 이해하려 했지만, 점차 도를 넘어섬에 내 마음도 멀어졌다.
그렇게 나와 그의 동생의 사이는 멀어졌고, 그도 동생을 달갑게 여기지 않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