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일기 |Day 1-2
19.09.04
거대한 불안감을 안고 올라탄 생장행 기차에서 의외의 인연을 만났다. 정확히 말하자면 생장으로 가는 환승지인 바욘이었다. 그전까지 어디 숨어있다 나오는 건지 생장행 기차에는 배낭 멘 순례자들이 바글바글 모여있었다. 서서히 내가 택한 길에 대해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곧이어 반가운 한국말들이 곳곳에서 들렸다. 순례길은 외국인 반, 한국인 반이라더니. 그 말이 과언이 아니었다. 이래서 친구를 사귀면서 간다고 말하나 보다 싶었지만 한국에서의 내성적인 성격이 여기 와서 굳이 바뀌진 않았다.
지하철 플랫폼에서와 다름없이 그저 멍하니 생장행 기차를 기다리며 시간을 축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면서도 한쪽으로는 무조건 동행을 구하라는 엄마의 걱정스러운 한마디가 귀에 아른거렸다. 그때 앞에 있는 친구의 핸드폰에서 언뜻 '카카오톡' 심볼이 보여 말을 걸었다. 그의 이름은 A였다. 나보다 꽤 어린 나이었지만 "산티아고에는 나이가 없으니 친구로 지내자!"라는 순례길 뽕 찬 내 말에 A는 웃었고, 우리는 곧 친구가 되었다.
생장은 생각보다 크고 따뜻했다. 숙소에 짐을 놓은 뒤 숙소에서 만난 한국인 친구를 한 명 더 섭외하여 우리는 함께 저녁을 먹었다. 앞으로 있을 길에 대한 두려움과 풍문을 전해 들으며 서로의 성공을 빌었다. 아름다운 밤이었다.
19.09.05
A는 다음 도착지인 론세스바예스에서의 숙소 날짜를 잘못 예약하여 생장에 이틀간 머물러야 한다고 했다.* 나도 생리통 때문에 쉬어가야 할지 고민이라고 했다. 우리는 함께 생장에서 연박을 하기로 결정했다.
생장에서 이틀을 연박하는 사람은 우리 밖에 없는 듯 싶었다. 모두가 떠난 이른 아침, 생장에는 먼저 출발한 사람들의 긴장감과 설렘의 공기가 가득했다. 우리는 출발 대신 공립 알베르게*에 찾아가 체크인을 기다렸다. 친절한 호스트가 짐을 미리 놔두어도 된다고 했다. 우리는 그곳에 짐을 두고 본래 체크인 시각인 2시까지 생장 거리를 활보했다.
그새 유럽의 거리가 익숙해진 것인지 어제와 달리 생장은 더 볼 것이 없었다. A와 나는 이곳에 온 이유, 앞으로의 계획 따위를 물으며 생장 골목을 산책했다. 돈을 아끼기 위해 샌드위치를 사서 강가 위 다리에 앉아 식사를 했다. 겉으로 보기엔 낭만적이고 실상은 꼬질꼬질한, 어쩌면 복선일지 모를 의미깊은 첫번째 날이었다.
*잠깐 산티아고 상식!
- 프랑스길의 첫 루트인 생장에서 론세스바예스로 가는 길은 피레네 산맥을 넘어가는 험난한 코스이다. 따라서 노약자나 초보자는 중간지인 오리손에서 하루 쉬고 가기도 한다. 론세스바예스에는 알베르게(숙박업소)가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일찍 도착하는 것이 힘든 사람들은 출발 전, 인터넷으로 미리 예약을 해두기도 한다.
- 산티아고 순례길에는 공립 알베르게와 사립 알베르게가 있다. 공립 알베르게는 5~10유로 선으로 싼 가격에 숙박을 제공한다. 사립 알베르게는 10~20유로 선으로 공립 알베르게보다는 비싸지만 더 좋은 숙소가 많다. 알베르게는 선착순 입실이기 때문에 좋은 숙소를 얻기 위해서는 빨리 도착해야 한다. 요즘에는 순례길 어플로 하루, 이틀 전 걸을 수 있는 거리를 예측하여 미리 예약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