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일기 |Day 2
19.09.06
새벽 5시부터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깨어났다. 부지런한 순례자들이 나갈 채비를 하는 소리였다. 나도 아직 잠들어있는 A를 깨워 급히 준비를 서둘렀다. 가까스로 6시 30분에 나왔지만 이미 모두 출발한 후였다. 이렇게 다들 새벽같이 나가다니... 경쟁심을 잊고자 온 순례길에서 뜻밖의 배신감을 만났다. 불쑥불쑥 피어나는 불안감을 마음 한 편에 밀어 넣고 캄캄한 골목을 헤드렌턴에 의지해 헤쳐나갔다. 이제 정말 출발이라는 긴장감과 설렘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완전한 시작이었다.
동키*를 했던 탓에 배낭이 없어 수월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오산이었다. 양 손으로 등산 스틱을 잡아야 한다는 것과 물을 충분히 준비해야 한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다. 욕심을 부려 사놓은 1리터짜리 물병은 작은 비상용 힙색에 들어가지 않았다. 결국 비닐봉지 하나를 구해 힙색에 묶어놓고 식량을 넣어두었다. 문제는 한걸음마다 묶어놓은 비닐봉지가 점점 내려온다는 사실이었는데, 이는 가뜩이나 무거운 어깨를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10분에 한 번씩 자세를 고쳐가며 초중반 쉼터인 오리손까지 어찌어찌 등반을 마쳤다.
문제는 내리막길이었다. 피레네 산맥은 오르고 올라 마침내 급격한 내리막을 맞이하는 곳이다. 과거에 한번 다쳐 걱정했던 오른쪽 무릎이 결국 아프기 시작했고 내리막을 네발로 내려올 지경이 되었다. 착한 A는 나를 포기하지 않고 중간중간 멀찌감치 서서 기다려주었다. 우리는 끝없는 내리막을 바라보면서 봅슬레이를 타고 내려가고 싶다는 뻘소리를 해댔고, 초월한 듯 웃었다. 그렇게 마침내 영영 오지 않을 것만 같던 종착지에 다다랐다. 그 순간, 마을 초입에서 들려오던 시냇물 소리를 평생 잊지 못 할 것이다.
물론 산행의 끝이 하루의 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후 3시까지 도착하면 충분할 것이라고 예상했던 론세스바예스의 숙박정원은 벌써 차 버렸고, 들어가지 못 한 나머지 순례자들은 다른 마을로 이동해야 했다. 다친 다리를 이끌고도 정확히 3시까지 도착하려 무진장 노력한 나는 절망했다. 도착은 애저녁에 했지만 쉬지도 못한 채 근처 에어비엔비를 찾아보았으나 워낙 산길이라 쉽지 않았다. A는 이미 론세스에서의 숙박을 미리 예약해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나는 다른 한국 사람을 섭외하여 트윈룸 호스텔 예약을 찾아보았다. 그렇게 B와 나는 친구가 되었다.
숙박을 구하지 못한 한국인들이 모여 두 시간 경을 헤매다 다음 마을인 Burguete의 알베르게를 가게 되었다. 도착해보니 론세스에서 자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있었다.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12유로짜리 저녁식사를 함께 하며 나름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오늘 너무 힘들었다고, 아까 걸을 때 아파 보이던데 괜찮냐고, 내일은 어떻게 갈 수 있겠냐고. 산티아고에서만 할 수 있는 대화를 와인과 함께 홀짝이며, 가끔은 길이 엇나가도 꽤 괜찮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잠깐 산티아고 상식!
- 동키는 다음 종착지까지 짐을 미리 운반해두는 서비스다. 전날 무리를 했거나, 힘든 산행이 예상될 때 동키 서비스를 이용하여 무거운 배낭 없이 한결 여유롭게 걸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