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영상을 만들었다. 나는 손재주가 없어서 무언가를 만드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편이다. 그것이 유형적이든 무형적이든 마찬가지이다. 평소에도 1분짜리 영상을 만들고 있어서 영상 편집이 직업인 사람들을 꽤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날은 그 생각이 더욱 확고해 지는 날이었다.
휴대폰 어플을 이용해서 영상을 만들때는 사소한 디테일을 신경쓰지 않아도 되었다. '사소함'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알 수 없어서이다. 영상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 6시간을 투자했다. 물론 처음해보는 작업이었고 휴대폰 어플이 아닌, 영상 전문가들이 선호하는 프로그램을 사용해야 했기에 미숙한 실력이 한층 몸을 고생시켰다.
'무식하면 몸이 고생한다'
옛날 어른들의 말씀은 틀린 것이 없다. 20대때 영상 작업 공부나 해둘걸. 이런 뒤늦은 후회를 했다. 하나하나 작업을 하면서 잘 되지 않아서 다시 처음부터 작업을 하고, 이것을 10번 정도 반복하고 나서는 아쉽지만 나름 만족하는 영상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반복해서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따라하고자 했던 실제 영상과 동일한 느낌을 가지려면 하나하나 작업을 해야한다. 그런데 이것을 경험하지 못하면 알 수 있을까?'
아! 이것은 클래식 필라테스와 같구나. 리포머에서의 움직임을 경험하지 못한 타인의 눈에는 각자의 움직임이 비슷해 보일 것이다. 사소한 디테일은 경험한 사람만이 혹은 완숙하게 경험한 사람만이 알 수 있다. 그렇기에 움직임이 비슷해 보여도 본질적인 움직임의 가치는, 타인에게 동일한 선상에 오르게 된다. 동일 선상에 오른 움직임의 가치는, 개인의 가치관에 따라 본래의 모습을 보여질 수도, 더럽혀진 모습으로 비추어질 수도 있다.
주인공 마리는 다카하시에게 프로 뮤지션이 될거냐고 묻는다. 다카하시는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난 그런 재능은 없어. 음악을 하는 건 재미있지만, 그걸로 먹고살 순 없어. 어떤 걸 잘하는 것하고 어떤 걸 정말로 크리에이트하는 것 사이엔 크나큰 차이가 있단 말이지. 난 트롬본을 꽤 잘 분다고 생각해. 칭찬해주는 사람도 있고, 칭찬받으면 물론 기뻐. 하지만 그뿐이거든."
애프터 다크, 무라카미 하루키
다카하시의 가치관에서 음악은 철저하게 구분되어있다.
'잘하는 것'
'크리에이트하는 것'
둘의 농도는 확실하게 다르다. 잘하는 것으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있고, 크리에이트한 것으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모두에게 동일하게 주어지는 기회는 아니다. 사람은 각자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역할에 충실해야 하지 않을까?
어쩌면 나는 영상 편집에 대해 쉬운 마음을 가졌던 것 같다. 유튜브에 만들어진 인트로 영상을 보면서,
'나도 만들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런 어리석은 생각을 했었다. 수많은 인트로가 쏟아져 나오는 상황에서 사람들의 시각은 점점 익숙해졌고 더 나아가 퀄리티 높은 것에 대한 시각이 익숙해졌다. 그런데 그것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의 작업이 쉬운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익숙해지면 그것의 가치를 평가하려는 어리석은 시도를 쉽게 하고는 한다. 개인은 자신의 노력은 크게 생각하지만 타인의 노력에는 평가를 낮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서이다.
클래식 필라테스도 마찬가지다. 많은 사람들이 유튜브, 인스타, 방송을 보면서 필라테스 움직임에 대한 시각이 익숙해졌다. 자신들이 생각하는 움직임의 농도는 점점 옅어졌다.(애초에 처음부터 농도가 없었을수도) 이들의 어설픈 생각은 조금씩 폭력적으로 변하게 된다. 내가 생각했던 어리석은 생각처럼.
'나도 할 수 있겠는데?'
그렇게 타인의 시간을 무시하는 폭력적인 행위를 서슴없이 하게 된다. 무서운 것은 그것이 폭력인지 모른채 저질러 진다.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너무나 쉽게 폭력적인 행위를 하게 되고, 폭력적인 상황에 쉽게 노출된다.
김보라 감독의 영화 '벌새'의 주인공 은희는 친오빠의 언어적, 물리적 폭력에 쉽게 노출된다. 그럼에도 부모들은 자신들의 삶에 치여 은희가 여성으로서 혹은 약자로서 당하는 유린을 방치한다. 단 한번 은희가 자신의 나약함을 딛고 일어섰을 때, 친오빠는 은희의 뺨을 후려친다. 그것을 눈 앞에서 목격한 아버지는 이런 말을 내뱉는다.
"대훈이 너 아버지 앞에서 뭐하는 짓이야?"
아버지는 은희가 노출된 물리적, 언어적 폭력에는 관심이 없다. 자신이 아버지로서 누려야 할 권력의 무너짐을 느끼고, 자신의 권력을 다시금 일깨울 뿐이다. 지금 시대와 영화 벌새의 90년대 사회 인식은 매우 다르다. 마치 사회적 합의를 이룬 것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은 폭력적인 인식에 익숙했다. 시대와 다른 생각을 조금이라도 하게 되면 주변에서 기다렸다는듯이 언어적 폭력이 나타났다.
'지금 시대는 소수의 진실된 가치관을 존중하는가?'
클래식 필라테스는 외로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필라테스의 인식은 사람들 속에 한 형태로 정해져버렸다. 다양한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모이면서 오리지널 필라테스는 사람들에게서 점점 멀어졌다. 조금만 경험해도 필라테스를 잘 하는 사람처럼 보이는 세상이 되었다. 방구석에 누워 손 쉽게 유튜브를 보면서 '나도 할만한데?'라고 말하듯이, 그들이 촬영 외 편집에 얼마나 시간을 들였는지, 조금씩 어떻게 성장했는지는 관심이 없다. 필라테스도 마찬가지다.
오리지널을 제대로 추구하는 사람들은 곁에 자신들이 이해하는 사람들이 모이기 마련이다. 소수 정예 멤버들이 항상 곁에 있다. 그렇기에 그들은 다양한 사람들의 생각에는 관심이 없다. 그들이 필라테스에 대한 생각이 어떻든 개의치 않는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모였던 이해관계들은 점점 더 다양해지고, 자신들의 욕심이 더욱 커져갔다. 거짓들이 모이게 되어 진실로 변하게 되고, 처음부터 진실을 추구했던 사람들은 거짓을 말하거나 거친 사람들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그들이 그렇게 생각했다고 해서 움직임의 시간과 형태는 변하지 않는다. 오리지널은 그 자리 그대로 견고하게 자리잡고 있다. 그렇기에 오리지널 시스템의 경험을, 많은 사람들에게 경험케해야 한다. 관심없었던 사람도 경험을 하면 관심이 생기기 마련이다. 처음부터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드물기에, 폭력적인 정보속에 머물어 있는 사람들을 폭력적이지 않은 오리지널 시스템으로 친절하게 안내해야 한다. 경험은 경험을 불러일으킨다. 조셉 필라테스가 많은 사람들에게 하지 못했던(혹은 하지 않았던) 경험을, 현대 필라테스 강사들은 진정한 경험을 그들에게 진심으로 선사해야 할 것이다. 그리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