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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ick Jun 06. 2023

필라테스 서비스직 아닌가? 왜 내가 닦아?


인스타그램에서 흥미로운 주제를 발견했다.


'필라테스 스튜디오에서 운동 후에 왜 청소를 회원들한테 시키는 것인가?'


이러한 주제를 가지고 옳다 그르다는 의견이 대립했다. 비싼 돈을 받으면 청소는 강사가 해야지 하는 의견과 깔끔하기 위해서 자신이 하는 게 좋다는 의견이었다. 그렇다면 왜 필라테스 스튜디오는 청소를 회원이 해야 할까? 정확히 말하면 왜 기구를 회원이 닦아야 할까?


이 부분에 대해서는 과거 이야기가 필요하다. 창시자 조셉 필라테스 시절에는 회원들이 레슨이 없는 시간에도 조셉의 체육관을 방문해서 스스로 운동을 했다. 체육관에는 조셉과 그의 아내 클라라 필라테스 그리고 오랜 조수들이 스스로 운동을 하고 있는 회원들의 움직임을 체크했다.(지금의 피트니스 센터와 비슷한 형태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자신이 운동한 기구를 닦는 것은 회원의 몫이었다. 다음 사람이 운동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구 청소의 주된 목적은 '자기 주도성'이 포함된다.


'뭐라고? 기구 닦는 것에 무슨 자기 주도성이 있어?'


조셉이 창안한 오리지널 필라테스는 누군가의 지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물론 어느 정도 기간까지는 강사의 설명을 듣고 익혀야 한다. 그렇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강사는 올바른 방향을 알려주는 가이드의 역할을 할 뿐, 회원의 움직임을 자신의 언어로 방해하지 않는다. 회원은 기구에 눕고, 몸을 움직이고, 스프링을 조절하고, 스트랩을 잡고, 박스를 어느 위치에 놓는지 이러한 모든 것을 스스로 조절할 수 있게 된다. 


'내가 혼자 조절할 거면 왜 비싼 돈을 주고 레슨을 받아?'


이러한 지적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필라테스가 아닌 필라테스를 말하는 많은 필라테스 스튜디오는 상냥한 웃음과 함께 회원의 움직임을 자신의 언어에 의해서 통제하고 있다. 회원은 설명을 잘 하고, 친절한 여자 선생님이 좋은 필라테스 강사라는 하나의 인식이 되어버렸다.


현재 필라테스 스튜디오는 그룹 수업을 하는 곳이 대다수이다. 적게는 4명 많게는 10명이 넘는 사람들이 한 공간에서 동일한 동작을 진행한다. 모두가 동일한 시간에 동일한 움직임을 하고 동일한 생각을 하면서 집으로 돌아간다. 조셉의 체육관에서는 회원들이 땀을 흘리며 각자가 다르게 움직였다. 동일한 시간에 모여서 동일한 운동을 하지 않았다. 자신의 속도와 리듬에 맞게 운동을 진행했다. 조셉은 체육관에서 회원들 간에 대화를 나누는 소리조차 용납하지 않았다. 그 시간만큼은 능동적이고 자율적이길 원했다. 


결국 많은 사람이 모이는 것은 동일하지만 조셉의 체육관에는 자기 주도성이 포함되었다면, 오늘날 많은 스튜디오에는 자기 주도성이 없다. 그렇기에 회원이 기구를 닦는 것에 대한 의견 대립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진짜 필라테스로서 고유명사가 있고, 필라테스라는 일반 명사를 사용하지만 진짜 필라테스가 아닌 필라테스를 하는 스튜디오들의 문제이기도 하다.




인간은 단지 실존하고 그 후에야 본질적인 자아가 된다. 사르트르에 의하면 실존이 본질에 선행한다고 말하는 것은 인간이란 우선 존재하며 자기 자신과 대면하고 세계 내에 출현하며 그 뒤에야 자신을 정의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최초에는 단지 한 개인만이 존재한다. 그리고 난 뒤 스스로 만든 우리가 존재할 뿐이다.인간은 그 자신을 어떤 미래로 지향시키며 자신이 그렇게 행위하고 있음을 의식하는 존재다. 실존을 인간 본성의 본질 앞에 위치시킴으로써 발생하는 가장 중요한 결과는 인간이란 스스로 창조할 뿐만 아니라 현재의 자신에 대해 책임이 있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소크라테스에서 포스트모더니즘까지, 새무얼 이녹 스텀프





그런데 오늘날 조셉 필라테스의 체육관과 동일한 모습으로 운영되는 스튜디오가 있다. 조셉 필라테스의 오리지널 시스템을 이어가는 클래식 필라테스 스튜디오이다.(물론 이곳에도 클래식 필라테스라는 명사만 사용하고 조셉의 방식과 거리가 먼 곳이 많다) 그곳은 그의 방식을 이어간다. 회원은 오리지널 필라테스를 하고 있으며 다음 사람의 사용을 위해 사용한 기구는 직접 닦는다. 자신이 사용하고 곧바로 다른 사람이 기구를 사용하기 때문에 끝나고 이동할 때 클리닝은 필수다. 강사가 기구를 닦기 싫어서가 아니라, 자신이 사용한 기구를 닦는 것까지 '자기 주도성의 연결'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식은 조셉의 방식을 정확하게 이어가는 스튜디오의 공통점이다.


'필라테스 스튜디오에서 운동 후에 왜 청소를 회원들한테 시키는 것인가?'


이러한 주제는 자기 주도성을 포함한 스튜디오이냐, 자기 주도성을 포함하지 않은 스튜디오이냐

이것이 중요한 문제가 된다. 애초에 조셉의 방식을 이어가는 곳은 회원들이 자신이 기구를 닦는 것을 몸으로 납득하기 때문이다.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조셉의 방식대로 한다고 말은 하지만 진정으로 조셉의 방식을 모르는 강사들이 '자기 주도성'이 결여된 채 레슨을 하면 고객은 클리닝을 납득할 수 없다. 물론 스튜디오 전체 청소는 당연하게도 강사의 몫이다. 그러나 자신이 사용한 기구는 스스로 닦아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사람의 존중을 포함한 능동적이고 자율적인 체육관의 모습이다.


그렇기에 인스타그램에서 떠도는 의견 대립은 조셉 필라테스가 만든 방식으로 운영되는 곳에는 전혀 문제 되지 않는다. 조셉 필라테스의 명사만 빌려서 변형된 방식을 하는 상냥하고 친절한 여자 강사들, 그리고 그러한 것이 진짜라고 믿고 10명씩 모여 필라테스 운동복이라고 지칭된 옷을 입고 똑같이 움직이는 고객들, 그들만의 대립이다.




영화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주인공 하울은 자유자재로 마법을 부리고 무언가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세상을 돌아다닌다. 반대로 소피는 부모님의 모자 가게를 이어 받아 마을을 떠나지 못한다. 황야의 마녀의 마법으로 인해 소피는 하루아침에 노인이 되고 오히려 이런 파국이 소피를 세상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사실 하울은 겉으로 보았을 때 자유로워 보였으나, 무서움이라는 공포로부터 도망치고 있다. 자신의 주도성이 없는 채로 살아가던 하울은, 노인이 되었지만 활기차고 당당 소피를 만나면서 점점 스스로의 공포로부터 벗어나려 한다. 전쟁을 막으려 고군분투하는 하울을 향해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소피는 말한다.


"하울 너를 위해 무엇이든 하고 싶어."

"고마워 소피. 그러나 이건 내가 스스로 해야 할 일이야."


하울은 그녀의 당당함과 자유로움을 보면서 자신의 인생을 되찾고 있다. 그럼에도 스스로 해야 하는 선택은 소피의 도움을 받지 않는다. 물론 소피의 도움은 진정 도움이 아니다. 그렇기에 하울은 자기주도적인 삶을 살게 된다.


소피의 사랑은 하울을 변화시킬 수 있는 용기를 만들어내지만, 자유를 쟁취하는 선택은 하울 스스로가 해야만 한다. 클래식 필라테스도 마찬가지다. 강사는 사랑을(?) 담아 올바른 방향을 가이드 하지만, 움직임은 고객 스스로가 주도적으로 해야 한다. 알을 깨고 자유를 쟁취한 하울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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