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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ick Jul 10. 2023

새는 힘겹게 투쟁하여 알에서 나온다

부부 필라테스 강사의 이야기


아침 레슨 중이었다. 그날 레슨은 오랜 인연을 이어가는 회원님이었다. 우리 부부는 김지혜 디렉터님의 필라테스를 동일한 시스템으로 배우기 때문에 누구에게 수업을 받아도 동일한 방식으로 받을 수 있다. 그렇게 회원님은 여느 때와 같이 리포머를 시작하셨다. 몇 주 동안의 움직임을 기억하고 있었는데 그날 움직임은 달랐다. 연결성이 좋아졌고 집중력이 좋아졌다. 어떤 동작의 테크닉이 좋아진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움직임이 달라 보였다.


즉, 주도적인 움직임의 모습을 더욱 짙게 띄었다. 강사의 소리에 집중되어 수동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강사의 적절한 언어와 핸즈온을 느끼면서 자신만의 리듬으로 스스로 움직이고 있었다.


감동을 받으면 입으로 내뱉어야 하는 성격인지라 회원님의 주도적인 움직임의 모습을 감동받고 칭찬을 연발했다.


'아! 역시 이것이 김지혜 디렉터님의 필라테스이다'


나의 바디로 언제나 느꼈던 것을 타인의 바디가 느낄 때의 모습은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을 선사한다.



배움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 한다. 이때껏 많은 사람들의 응원을 받기도 했지만,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걱정 어린 시각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서울에 배우러 다니는 건 언제까지 하는 거야?"


배움의 끝은 어디일까? 사실 우리도 알 수 없다. 배움의 경험은 언제나 우리들은 숙연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자신의 부족함을 현저하게 깨닫고 현실 속으로 내던져진다. 그곳에는 언제나 깨우침의 감격만 있는 것이 아니다. 깨우치지 못할 때의 좌절감이 가득하다. 그렇기에 우리들의 배움은 언제나 현재진행형이다.


앎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앎을 알아가는 시작이다. 조그마한 앎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것의 앎도 없는 사람이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에서 이런 구절이 나온다.


"새는 힘겹게 투쟁하여 알에서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우리 부부의 경험은 단순하게 지식을 배우는 행위가 아니다. 어제와 오늘의 나를 깨뜨리고, 내일의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려는 행위이다. 그런데 어찌 그곳의 끝을 알 수 있을까. 아마도 죽을 때까지 세계를 깨뜨리는 행위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가장 슬픈 것은 스스로 자신의 세계의 끝을 알고 있다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 끝이 아닐 텐데 스스로 끝의 기준을 정해놓는 것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 '데미안'을 만든 헤르만 헤세는 소설의 표현처럼 자신의 힘들었던 삶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세계를 깨뜨렸다. 그의 자전적 소설의 모습처럼.


자신의 한계를 정하고 사는 대로 생각하며 자신의 세계를 보존하려는 삶은 슬프다고 할 수 있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자신의 세계를 깨뜨리지 못하는 삶은 불행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언제까지 배우는 것에 대한 힘듦을 느끼는 것보다 자신의 세계를 계속 깨뜨릴 수 있는 것으로 감사함을 느껴야 한다.






영화 '더 파더'는 치매를 앓는 노인이 자신을 잃어가는 일상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가 느끼는 의식은 매시간 다르다. 딸의 모습도 다르고 마주하는 상황도 다르다. 점점 자신을 잃어간다. 그에게는 깨뜨려야 할 세계는 더 이상 없다. 그의 세계는, 깨뜨리고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빠르게 파괴되어 갈 뿐이다.


'깨뜨리다'와 '파괴되다'라는 다르다. 깨뜨리는 것은 다시 태어남을 의미하지만 파괴되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의식이 점점 상실되는 삶을 마주하는 것은 지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삶을 충실하게 살아야 한다. 자신의 세계를 지속적으로 깨뜨려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오베라는 남자'는 다른 의미로 깨뜨림과 파괴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평생 깨뜨림 없이 보존되는 삶을 살아간 주인공 오베는 아내의 죽음 이후 자신의 삶을 더 이상 이어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아내의 죽음과 동시에 자신의 삶은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파더'의 안소니와 다르게 오베는 파괴되었던 삶이 회복되는 삶으로 변하고 있다. 주변 사람들의 도움 덕분이다. 과거 그는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철저하게 배제하는 삶을 살았지만 파괴된 삶이 절정에 다다랐을 때, 신기하게도 파괴된 삶을 마주하면서 관계의 정의를 다시금 새롭게 만들어 나가고 있다. 다른 의미로서 파괴된 세계를 깨뜨려 다시 태어난 것이다. 



배운다는 것에는 대단한 감수성이 내포되어 있다. 관념이 있는 자리엔 감수성이 없는데, 그 이유는 관념이란 과거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현재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음은 더 이상 민첩하지도, 유연하지도, 주의 깊지도 않다. 우리들 대부분은 육체적으로 조치 민감하지 못하다. 과식하고, 올바른 식사법에 대해 신경 쓰지 않으며, 담배를 지나치게 많이 피우고 과음함으로써 우리의 몸은 뚱뚱해지고 무감각해진다. 유기체 자체의 주의력이 둔감해지는 것이다.
유기체 자체가 둔감하고 무겁다면 어떻게 민첩하고, 민감하고, 맑은 마음이 있을 수 있겠는가?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파괴되는 삶을 마주하는 사람도 있고 회복하는 삶을 마주하는 사람도 있다. 반면 우리 부부의 삶은 그들과 다르게 파괴되지 않는다. 혹은 안소니처럼 지옥 같은 삶을 살지도 않는다. 그저 깨뜨리고 다시 태어나는 삶을 반복할 뿐이다.


그런데 현재의 삶을 깨뜨리기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우리들의 삶은, 파괴도 깨뜨림도 회복도 아닌 그저 불안정이다. 당연하게도 깨뜨려지고 다시 태어나는 삶은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안정을 외치면서 깨뜨리는 행위를 할 수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부부의 삶은 헤르만 헤세의 시각에서는 지극히 공감될 삶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다시 돌아와서 회원들의 움직임의 성장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삶 속에는 필라테스가 자리 잡혀 있다. 만약 몇 주, 몇 개월, 몇 년 동안 동일하게 움직인다면, 그들은 안정적인 행위만을 반복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들은 깨뜨려지고 다시 태어나는 행위를 반복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의 시스템은 더욱 발전한다. 우리 부부가 깨뜨려지고 다시 태어남을 반복하듯이, 그들의 움직임은 깨뜨려지고 다시 태어남을 반복한다. 


그렇기에 강사와 회원의 관계는 발전된 관계이다. 깨뜨려지고 다시 태어나는 반복을 하지 않는 강사는 회원에게 온전한 안정만을 즉, 깨뜨려지지 않는 무기 건조함만을 안내하게 된다. 인간은 시간이 흐를수록 성장해야 한다. 무조건 힘들게 살아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삶을 충실하게 살아야 한다.


그리고 깨뜨려지고 다시 태어날 때 우리는 회복하며 잠시 멈춰서 쉬어 가기도 한다. 그리고 다시금 앞으로 나아가간다. 그저 제자리만 영위하는 삶을 지키는 사람은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의 자리보다 더 뒤쪽으로 밀려나게 되어 있다. 인간은 시간이 흐를수록 젊음보다 늙음에 더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깨뜨려지고 태어남을 반복해야만 늙음을 마주해도 삶을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다. 아마도 이것이 우리 부부가 지속적인 배움을 추구하는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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