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아침 출근길, 사당에서 전철을 타고 가다가 당산역에서 9호선으로 환승한다. 환승을 하려면 하행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가야 하는데, 이 구간의 하행 에스컬레이터는 마치 땅굴로 들어가는 것 같이 경사가 심하고 꽤 깊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하로 한참 내려가면 환승 개찰구가 나오고,
환승 개찰구를 지나고 나면 짧은 구간의 하행 에스컬레이터가 한 번 더 나온다. 이 마지막 구간의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조금 더 지하로 내려가면 왼쪽에는 개화행 열차 승강장, 오른쪽에는 중앙보훈병원행 열차 승강장이 있다.
두 승강장 사이에는 의자가 있어 행선지 열차가 올 때까지 앉아 기다리는데, 어디선가 '탁, 탁, 탁' 둔탁하게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내 머리 위쪽 방향, 방금 환승을 하느라 지나온 환승 개찰구 쪽에서 나는 소리다. 가만히 듣고 있으면 마치 회초리로 바닥을 치는 것 같은 소리가 일정하게 들려온다.
누가 내는 소음일까, 환승 개찰구 어디쯤에서 무엇을 수리는 소리인가? 그렇다고 하기에는 두드림의 속도가 일정하고, 굉음도 아니다. 지나치지 않은 소리, 그냥 딱 '회초리로 바닥을 두드리는' 정도의 소음이다.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보니 마침 열차가 도착했다. 나는 금세 자리를 떴고 그 소리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었다.
그러다 얼마 전에 그 소리의 원인을 알았다. 그날도 출근길에 당산역에서 9호선으로 환승하기 위해 가파른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와 환승 개찰구를 지나고, 다음 승강장으로 걸어가는 중이었는데 '탁, 탁, 탁' 익숙한 회초리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가던 길을 잠시 멈추고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그때 지팡이로 바닥을 짚으며 걸어가는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지팡이로 바닥을 짚어 가며 진행 방향을 찾는 듯 보였다. 아침 출근길엔 지하철 인파가 몰리는 데다, 핸드폰만 쳐다보고 걷는 사람이 하도 많아서 주변을 잘 살피면서 걷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치이는 일이 다반사다. 나도 신발 뒤축이 밟히거나 어깨를 치이거나 하는 일을 비일비재하게 겪는다.
한창 사람이 몰리는 시간에 지팡이에 의지해 길을 찾는 그가 무척 위태롭게 느껴졌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사람들은 그 사람을 쏙쏙 잘도 피해 지나갔다. 그리고 내 우려와 달리 그는 무사히 상행 에스켈레이터를 타고 환승 개찰구로 올라갔다.
회사 입사 면접 때,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일하다 동료와 의견 충돌이 생기면 어떻게 하시나요?'
그에 대한 대답은 내가 20대일 때와 30대일 때가 서로 달랐을 거다. 40대가 된 지금은 '일'도 '성과'도 중요하지만 그만큼 '관계'를 쌓고 유지하는 것도 아주 중요하고 힘든 일임을 깨닫는다. 어릴 때는 의견이 '다름'에만 주로 집중했다면, 이제는 의견이 다른 '배경'에 대해 생각해 본다.
사람과 사람이 얽히고설켜 살아가는 복잡한 세상에서 어느 집단, 어느 조직이든지 의견 차이, 의견 다툼이 발생하는 건 당연한 현상이다. 그리고 그 다툼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입장 차이'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릴 때의 나는 내가 틀리는 경우의 수를 희박하게 셈했고, 더불어 나는 꽤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판단을 하는 편에 속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점차 '내가 틀릴 수도 있다' 아니, 어쩌면 '내가 자주 틀린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사람은 성숙할수록 더 겸손해져야 하고, 자기주장을 관철하려는 목적에 치우치기보다는 대화의 맥락과 상황,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하는 태도와 마음이 중요함을 깨닫는다.
나이를 먹을수록 경륜과 경험이 쌓이고, 그렇게 쌓인 데이터는 판단의 나침반 역할을 한다. 쌓인 통계값은 '통계적으로 그래왔기 때문에'라는 프레임으로 매우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뉘앙스를 갖는다. 그러나 그 통계는 처음부터 한계가 있다. 표본이 매우 적고 변수도 제각각이며 지극히 주관적인 경험이다.
그러니 자만함으로 남을 쉽게 판단하거나 자신의 지나친 확신으로 누군가에게 조언하는 일은 어찌 보면 매우 위험하다.때로는 '그럴 줄 알았다.'라고 너무 '뻔하게' 말하는 조력자의 자만과 확신이 누군가를 과도한 후회와 자책감에 사로잡히기게 하거나 미래로 나아갈 힘을 잃게 만들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성숙'이라는 것은 나의 한계를 알고, 그 한계를 인정할 줄 아는 용기와 지혜를 얻는 과정이 아닐까.
또한 자신의 영향력에 대해 인식하고 '어떤 사람을 만날까'만큼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까'를 고민하는 게 어른이지 않을까.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남 탓'부터 시작하던 버릇이 나를 돌아보는 '반성'과 '성찰'로 바뀌는 지경에 이를 것이다.
"우리의 얼굴은 누군가에게는 탁월함의 기준을 높이는 자극이 되기도 하고, 그 기준을 낮추는 자극이 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탁월함에 대해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 최인철 <<프레임>>
내가 누군가의 탁월함에 빚지고 있다는 나의 역할과 책임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내가 함께 속한 공동체는 '위험한 순환'을 반복하게 될 것이다.
나는 이제 '내가 옳은가, 당신이 더 옳은가'를 생각하기보다 내가 미칠 '영향력'에 관해 더 고민해야 한다.
맨 처음 승강장에서 '탁, 탁, 탁' 바닥을 두드리며 걸어가는 남자를 보면서, 나는 그가 지팡이에 의지해 진입로의 방향을 정한다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니 그 소리는 마치 일종의 신호 같기도 하다.
지팡이가 바닥을 짚는 소리 덕분에 그는 출근길 인파 속에 섞여 있으면서도 다른 사람과 부딪치지 않는다. '탁, 탁, 탁' 일정하게 울리는 소리는 시각 장애를 가진 그가 인파 속에 있는 상황을 우리에게 인지 시켜 준다.
내가 상대의 발에 걸려서 넘어져도 안되지만, 상대도 내 발이나 지팡이에 걸려 넘어지게 해서는 안 된다는, '내가 받을 영향'과 '내가 미칠 영향'의 균형을 유지하도록 각성하는 울림, 마치 회초리로 바닥을 치며 울리는 일침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