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시고 싶어 잡수신 건 아니지요. 누가 당신께 약주를 권하는지 내가 알아낼까요? 저…… 첫째는 홧증이 술을 권하고 둘째는 ‘하이칼라’가 약주를 권하지요.”
아내는 살짝 웃는다. 내가 어지간히 알아맞혔지요 하는 모양이었다.
출근하고 모니터를 켠 지 얼마 되지 않아 핸드폰을 보니 부재중 전화가 와 있다. 요즘은 거의 아침 인사 수준이다. 다시 핸드폰에 모르는 번호가 뜬다. '받을까...?' 잠시 망설이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통화 버튼을 누르자, 역시나 오늘도 스팸 전화다. 수화기 너머 누군가 친절히 대출을 안내한다.
언제부터인가 코인이나 주식 투자를 안내하는 문자가 국내고 해외고 할 것 없이 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번호를 바꿔가며 정성껏, 주기적으로 성실히 발송한다. 나는 문자를 열자마자 차곡차곡 스팸 문자로 넘긴다. 문자가 올 때마다 스팸처리, 수신 거부를 누르지만 효과는 매우미미하다. 며칠 전부터는 새로운 스팸이 오기 시작했다. 스팸을 걸러 주는 어플 화면에 '대출 권유'라고 뜬다.
갚을 계획 애매하고 신용을 주기도 어려운데, 내 속 사정을 모르는 스팸은 자꾸만 대출을 권한다.
오랜만에 열어 본 책상 서랍에서 꽉 찬 서류들이 쏟아지듯이, 내 삶의 귀퉁이에 미뤄둔 사정들이 차곡차곡 쌓여 휘청거린다.
부지런히 삭제하고 비워 내도 어느새 쌓이는 집요하고 끈질긴 스팸같은 사정들. 어제에 발목잡히지 않으려고 내일의 묘수에 다시 한번 기대를 걸어 본다.
뭐, 괜찮다.
"천천히 식사를 마치고 따뜻한 커피 한 잔 곁에 두고 앉아, 책을 읽는다. 아 참, 베란다에 심어둔 제라늄에 물을 좀 줘야지. 노랗게 마른 잎은 떼어 내고, 화분은 볕을 잘 받는 곳에 두어야지. 다시 소파에 앉아 발톱이나 정리하다가 그래, 오늘은 좀 더 화사한 색으로 발톱에 색을 칠한다...."
대충 이런 날을 생각하지만,
실상 나는 매일 회사에 출근해 컴퓨터 모니터 앞에 앉아 있다.
사무실 창문 너머로 건너편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놀이터가 보인다. 점심 먹고 나면 그 놀이터로 종종 산책하러 가곤 하는데, 거기에는 조용히 앉아 쉬기 좋은 벤치가 하나 있다.
햇살 기운을 받으며 잠시 멍하니 앉아있으면 청량한 새소리, 인근 유치원에서 재잘거리는 아이들 소리가 배경음악처럼 깔린다. 가만히 앉아 그 소리를 듣는다. 그러다 보면 내가 마치 그들의 풍경에 하나의 배경이 된 것 같다. 그들은 생기 있게 떠들고 움직이는데 나만 홀로 정지해 있다.
“틀렸소, 잘못 알았소. 홧증이 술을 권하는 것도 아니고, ‘하이칼라’가 술을 권하는 것도 아니요. 나에게 권하는 것은 따로 있어. 마누라가, 내가 어떤 ‘하이칼라’한테나 홀려 다니거나, 그 ‘하이칼라’가 늘 내게 술을 권하거니 하고 근심을 했으면 그것은 헛걱정이지. 나에게 ‘하이칼라’는 아무 소용도 없소. 나의 소용은 술뿐이요. 술이 창자를 휘돌아, 이것저것을 잊게 만드는 것을 나는 취(取)할 뿐이요.”
하더니, 홀연 어조(語調)를 고쳐 감개무량하게,
“아아, 유위유망(有爲有望)한 머리를 ‘알코올’로 마비 아니 시킬 수 없게 하는 그것이 무엇이란 말이요.”
하고, 긴 한숨을 내어 쉰다. 물컹물컹한 술 냄새가 방안에 흩어진다.
아내에게는 그 말이 너무 어려웠다. 고만 묵묵히 입을 다물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슨 벽이 자기와 남편 사이에 깔리는 듯하였다.
...
이윽고 남편은 기막힌 듯이 웃는다.
“흥 또 못 알아듣는군. 묻는 내가 그르지, 마누라야 그런 말을 알 수 있겠소. 내가 설명해 드리지. 자세히 들어요. 내게 술을 권하는 것은 홧증도 아니고 ‘하이칼라’도 아니요, 이 사회란 것이 내게 술을 권한다오. 이 조선 사회란 것이 내게 술을 권한다오. 알았소? 팔자가 좋아서 조선에 태어났지, 딴 나라에 났다면 술이나 얻어먹을 수 있나…….”
최근 핸드폰으로 전자책 구독을 시작했다. 국어책에 나온 작품을 읽다가 눈물 쏟을 뻔했던 현진건의 소설을 오랜만에 읽는다. '운수 좋은 날'은 여러 번 접했지만, <술 권하는 사회>는 이번이 처음이다.
현진건의 <술 권하는 사회>는 일제 강점기 지식인의 고뇌를 담은 작품이다.
여자(아내)는 매일 술을 마시는 남자가, 남자(남편)는 자신의 홧증을 이해하지 못하는 여자가 답답하다.
아침에 전철을 타다가 신발이 문에 걸려 넘어졌다. 지하철 문이 닫히기 전에 급히 타려다가 아침부터 결국 수치를 면치 못했다. 그날따라 다른 승객들은 모두 자리에 앉았고 빈자리도 꽤 있었다. 그런데 나 혼자 급히 열차 안으로 들어오다 넘어졌으니, 사람들도 적잖이 놀랐을 거다. 다들 놀라 '어머, 어머'를 연발하는데 그 정신없던 와중에 그 감탄사가 내 귀에 꽂혔다.
너무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라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그 '어머, 어머' 하는 소리가 내가 안타까워서인지, 내가 웃겨서인지 잘 모르겠다. 이럴 땐 일단 빨리 자리를 뜨는 게 상책이라는 생각이 앞서 무릎을 급히 털고 태연하게 다음 칸으로 넘어갔다.
다음 열차 칸에서 비어 있는 자리에 앉고 나니, 나도 웃음이 터져 나온다.
'어머, 어머'
그말이 차라리 동정이었다면 좋았겠다고 생각해 본다.
고요한 밤공기를 울리는 구두 소리는 점점 멀어간다. 발자취는 어느덧 골목 끝으로 사라져 버렸다. 다시금 밤은 적적히 깊어간다.
“가버렸구먼, 가버렸어!”
그 구두 소리를 영구히 아니 잃으려는 것처럼 귀를 기울이고 있는 아내는 모든 것을 잃었다 하는 듯이 부르짖었다. 그 소리가 사라짐과 함께 자기의 마음도 사라지고, 정신도 사라진 듯하였다. 심신(心身)이 텅 비어진 듯하였다. 그의 눈은 하염없이 검은 밤안개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그 사회란 독(毒) 한 꼴을 그려보는 것같이.
쏠쏠한 새벽바람이 싸늘하게 가슴에 부딪친다. 그 부딪치는 서슬에 잠 못 자고 피곤한 몸이 부서질 듯이 지긋하였다. 죽은 사람에게서 뿐 볼 수 있는 해쓱한 얼굴이 경련적으로 떨며 절망한 어조로 소곤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