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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직한연필 Jul 20. 2024

나의 대나무 숲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삼국유사에 실린 신라 시대 경문왕의 일화다.


경문왕은 왕위에 오른 뒤 귀가 점점 커졌다. 귀는 계속 커지더니 결국 당나귀 귀처럼 되었다. 


충격을 받은 왕은 커다란 두건을 만들어 자신의 귀를 감추려고 했다. 


서둘러 두건을 만드는 장인을 불러 당부하기를


"귀를 감출 만큼 커다란 두건을 만들되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사실 당부가 아니었다. 비밀을 외부에 발설하는 순간 장인은 물론이고 장인의 일가를 죽인다는 협박이었다. 


이후 장인은 임금의 비밀을 아무 데도 말하지 못한 채 가슴속에 담고 살아야 했고 그로 인해 병이 났다. 장인은 자신이 죽기 전에 꼭 한 번만이라도 속 시원하게 비밀을 말하고 싶어서 한밤중에 대나무 숲을 찾아갔다. 그리고 숲에다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비밀을 털어놓았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다." 


마침내 장인의 속이 후련해졌다. 




동화를 읽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나의 대나무 숲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니 내게 아주 특별한 대나무 숲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나의 남편. 

하나뿐인 남편이다.


우리는 약 20년째 서로의 대나무 숲이다. 


결혼 20년 차를 바라보면서 결혼이 주는 의미도 우리의 세월만큼 무르익어 왔다. 연애, 첫사랑, 설렘, 영원함... 20대의 풋풋함이 낳은 수식어로 인해 하늘로 공중 부양되던 어린 시절의 감정이, 이제는 현실이라는 지상에 두 발바닥을 바짝 디뎠다. 


지상의 마른땅, 질퍽한 땅, 갈라진 땅을 밟으면서 우리는 나란히 걷고 또 걸었다. 그동안 막연하게 허공에 띄우던 이상들은 상당 부분 현실적으로 교정되었다. 그리고 '사랑'이라는 단어가 참으로 많은 명사를 포괄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사랑'

사랑이 품고 있는 의리, 우정, 그리움, 미안함, 고마움... 


인생의 발자국을 따라 그려 온 우리들만의 이야기가 만들어낸 풍부한 감정과 명사는 우리 둘 사이를 공고히 이어 주었다.


반면에 밖에서 있었던 일은 집까지 가지고 가지 않고 내 가족이 힘들어할까 봐 일절 티를 내지 않는다는 부부도 있다. 무엇이 더 나은 방법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몇 번이 되었든 서로가 서로에게 숨 쉬게 해 줄 숨구멍 하나가 되어 준다는 것은 참 감동적인 일이다. 세상에 둘도 없는 그런 존재가 하나 있다면 무척 든든하고 감사할 일이다.


어떤 날은 남편의 이야기를 들어줄 준비가 안 된 날도 있다. 나 역시 너무 지친 날 그렇다. 그럴 때는 솔직히 이야기한다. 그 사람의 말, 그 사람의 마음, 그 사람의 전부를 거절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부부라고 해도 서로 너무 얽히고설키다 보면 내가 온전히 서 있기가 어려워질까 봐, 종종 적당한 거리 두기를 한다.


책을 읽다 보니 재미있는 실험 결과가 눈에 띈다. 독신자에 비해 기혼자의 사망률이 눈에 띄게 낮다는 연구 결과이다. 미국 예일대학교 리사 바크먼 교수 연구팀이 성인 6,928명을 대상으로 9년에 걸쳐 기혼자와 독신자의 사망률을 조사했더니 기혼자가 독신자보다 사망률이 낮게 나왔다. 특히 그중에서도 남성이 여성에 비해 눈에 띄게 낮았다.


결혼으로 인해 겪는 스트레스도 상당하지만, 독신자의 외로움도 그에 못지 않나 보다.


결혼이 그려 내는 인생의 풍경이 늘상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것을 안다. 때론 둘임에도 처절한 외로움을 느껴야 하고, 결혼으로 인해 지켜야 할 것들이 늘어나면서 감당해야 하는 의무와 책임도 무겁다. 그러나 내가 선택했고 내가 꾸려 온 인생이지만, 다시 보면 내게 공짜로 주어진 선물도 많았다. 


빛바랜 일기장을 뒤지다가 발견한 연애편지처럼, 때론 하늘이 나를 위해 슬쩍 넣어준 소소한 일상과 기쁨이 보물찾기 하듯 발견될 때가 있다.


오늘 내가 찾은 보물은 바로 나의 대나무 숲이다. 기꺼이 나의 대나무 숲이 되어주기로 20년째 다짐하고 곁을 내어주는 사람이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다!" 


속 시원하게 외칠 수 있는 나만의 대나무 숲의 재발견이다.


바라건대, 그대에게도 그대만의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들어줄 대나무 숲,

하나쯤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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