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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욱근 Mar 23. 2020

야식이란 무엇인가


퇴근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아직 일이 손에 익지 않은 탓인지 끝내야 할 일만 서둘러 마무리하고 나왔는데도 이미 열 시가 넘어 있었다. 지하철 4호선을 타고 길음역에 내려 다시 정릉으로 가는 마을버스를 탔다. 아침에 엄마가 다려서 목에 걸어준 넥타이가 푹 고은 육수용 멸치 마냥 매가리가 없어 보인다. 2년 동안의 취업준비 끝에 얻은 꿈의 직장이었다. 첫 출근 날 열심히 하겠다는 나의 인사를 “열심히 하면 안 되고 잘해야 돼”라고 정정해준 대리님의 말씀을 머릿속에 각인하고 다니고 있다. 물 위에 떠있는 기분이다. 가라앉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어느덧 버스는 아파트 단지의 입구에 도착해 있었다. 아침의 부산스러운 공기와는 사뭇 다른 정적 속에서 나지막한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아파트 단지 내로 들어가기 위해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불 꺼진 간판들 속에서 홀로 환하게 빛을 내는 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에펠탑’ 문양의 네온사인이 그려진 빵집이었다. 나는 어두컴컴한 복도에서 비상구 표지판을 만난 듯 그곳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이미 늦은 시간이라 대부분의 빵은 이미 다 팔린 상태였다. 남아있는 것이라곤 소보로빵, 땅콩크림빵, 초코 소라빵처럼 이름만 들어도 중후한 느낌이 드는 빵들이었다. 나는 그것들을 두어 개씩 집어 트레이에 옮겨 담고는 계산대로 향했다. 배가 고파서 사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무언가를 사야 한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을 뿐이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선 집안은 조용했다. 부모님께서는 이미 잠자리에 드신 듯했고 동생 녀석의 방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나는 조용히 비닐봉지를 식탁에 올려놓고 씻기 위해 화장실로 향했다. 그런데 씻고 나와 방으로 들려가려는 그때 부엌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싶어 부엌으로 다가가 보니 잠에서 깬 아버지가 빵 봉투를 뒤적이고 계셨다. 아버지는 뒤돌아 나를 보고는 “왔나”라는 짧은 인사와 함께 초코 소라빵을 한입 베어 무셨다. 나는 불 켜진 가게를 발견한 것처럼 부엌으로 걸어가 아버지 옆 의자에 앉았다. 빵을 먹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옆에서 보고 있자니 가을밤의 파도처럼 복잡한 감정이 밀려왔다. 우리가 별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다. 그저 너무나도 맛있게 먹어주는 아버지의 모습이 나에겐 위로였고 포옹이었다. 나도 봉투 속에서 소보로 빵을 꺼내 한 입 베어 물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께서는 퇴근 시간이 늦으신 날이면 어김없이 까만 봉투와 함께 들어오셨다. 우리는 이부자리에 누워 있다가도 바스락거리는 비닐 소리를 듣고는 거실로 달려 나가곤 했다. 비닐 속에는 주로 빵이 담겨있었다. 그런데 항상 빵 종류가 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소시지 피자 빵이나 크림치즈 도넛을 좋아한다고 누누이 말씀드렸건만 아버지께서는 매번 밤식빵이나 모카빵 같은 어른 취향의 빵만 사 오셨다. 정작 자신은 몇 입 먹지도 않으면서 왜 이런 빵만 사 오는지 그땐 이해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이 돈을 모아 통닭을 한 마리 시켜주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했다.


문득 아버지께서 사 오신 야식은 자신을 위한 또 다른 발버둥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를 다니며 하루의 절반을 모니터 앞에 앉아 있으니 내가 사람인지, 모니터 옆의 선인장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때가 있었다. 온몸이 가시라도 돋는 듯 근질거려도 쉽게 일어날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가는 길 아직 열려 있는 가게가 반가웠다. 비록 인기 없는 빵들만 있었지만 카드를 건네며 결제를 하는 순간 다시 사람으로의 숨통이 트이는 것만 같았다. 한편으로는 가족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오늘 제가 야근까지 총 13시간 동안 일을 했습니다. 일해서 번 돈으로 이렇게 먹을 것도 사 왔습니다. 힘들게 일한 것을 저를 좀 알아봐 주십시오 하고 말이다. 아버지는 이렇게 투정을 부릴 수도 없으니 자식을 불러 모아 얼굴을 한 번 보는 것만으로 푸념을 대신하신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뚜렷하던 전등이 아른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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