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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욱근 Mar 23. 2020

가을이란 무엇인가


해가 중천에 떠있는 대낮임에도 거리에 사람들이 가득하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냉방시설을 찾아 실내로 들어갔던 사람들이 밖으로 나오고 있다. 가끔 가을에게 방울을 달아 놓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온다는 기척이라고 하고 오면 좋으련만 워낙 소리 없이 찾아오는 탓에 반팔 차림으로 나왔다가 서늘한 밤공기에 당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감기로 고생하는 계절이 가을인 이유다. 이 무례한 계절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가을이 왔다고 유난인 것을 보면 가을에게 봄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는 듯하다.


 거리로 나와 사람들의 행렬에 동참해 공원으로 향했다. 아직 여름 기운이 조금은 남아있는지 이슬 같은 땀방울이 콧등에 맺히지만 금세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어와 보송보송하게 말려준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식히며 손 부채질을 하지 않아도 되니 사람들의 표정에서 저마다의 여유가 느껴진다. 공원 한편에 놓인 나무 밑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니 내 옆에 앉은 중년 부부는 한 손에 비스킷을 들고 어린 날 들판에서 잠자리를 잡았던 추억을 나누고 있다. 내 뒤에 있던 인상 좋은 청년은 들고 있던 책을 베개 삼아 의자에 누워 제주 바다 같이 맑은 하늘을 바라본다. 쉴 새 없이 바닥을 쪼아대던 비둘기들도 분위기를 아는지 목각인형처럼 가만히 서있다. 가을바람의 장단에 맞춰 수줍은 햇살이 나뭇잎 사이로 반짝였다.


 가을은 거리 위의 책과 같다. ‘가을 타는 남자.’라는 말이 있듯 유독 가을만 되면 사람이 감성적으로 변하게 되는데 이는 자연이 우리에게 생각에 잠길 환경을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가을에는 여름이 주는 축축한 땀도 없고 겨울이 주는 시린 입김도 없다. 우리는 가을 햇살의 따스함과 그늘의 서늘함을 동시에 맞으며 길을 걸을 수 있는데 이는 마치 에어컨을 틀어 놓고 이불을 덮는 것과 같이 묘한 기분이 든다. 이렇게 가을이 주는 분위기에 빠져 거리를 걸으면서 화려한 봄의 꽃들에 시선을 뺏길 이유도 없으니 자연스레 사색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중년 부부의 깍지 낀 손을 보며 그들의 청춘을 떠올리기도 하고 청년 눈에 비친 하늘을 보며 그의 소망도 짐작해본다.


 가을은 우리가 생각에 빠질 수 있는 분위기와 환경을 제공해 주면서도 책이나 공연처럼 돈을 지불하지 않아도 되는 경제적인 부분도 갖추고 있다. 우선 더위나 추위를 피해 카페에 들어갈 필요가 없다. 밥값보다 더 비싼 커피값을 내지 않고도 충분히 벤치에 걸터앉아 함께하는 이와 오손도손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가을이 주는 혜택인 셈이다. 심지어 여름처럼 에어컨 전기 요금과 겨울의 난방비도 들지 않으니 참으로 고마운 계절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어제의 저녁 시간이 오늘의 밤으로 변하는 가을은 노을이 지는 시간만큼이나 빨리 지나간다. 빨갛게 물든 단풍이 하나 둘 바닥으로 떨어질 때면 선선한 바람은 소리 없이 차디찬 겨울바람으로 바뀌어 있다. 더 이상 집 밖으로 나오기를 주저하면 안 된다. 가을이 주는 특혜를 아낌없이 누려야 한다. 동물들이 떨어진 열매로 배를 채울 때 우리는 가을이 주는 시간으로 마음을 넉넉하게 채워야 한다. 겨울이 와도 꺼지지 않을 따뜻한 마음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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