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욱근 Mar 23. 2020

여행이란 무엇인가

 가을 하늘처럼 느슨한 파란 내복을 입고 잠에 들던 시절, 나는 소풍을 가기 전날이면 어김없이 복통이 찾아왔다. 딱히 자극적인 음식을 먹은 것도 아니었다. 잠에 들기 위해 가만히 누워 있으면 거짓말처럼 아랫배가 조여왔고 나는 이부자리를 걷고 화장실로 달려가야만 했다. 평소와 같았으면 온갖 인상을 있는 대로 찌푸리며 배를 부여잡고 있었겠지만, 그때만큼은 달랐다. 이부자리에서 끝내지 못한 내일의 상상을 이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화장실의 눅눅한 공기는 비단잉어가 헤엄치는 어느 호수 옆을 지나가게 했고, 고약한 똥냄새는 은행나무 밑의 노란 카펫 위를 걷게 했다. 


 어른이 된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다. 여행을 준비하는 이들의 얼굴에는 발이 허공을 휘젓는 것처럼 들뜬 기색이 가득하다. 비행기를 기다리며 공항에 앉아 있다 보면 축축하게 젖은 머리와 함께 헐레벌떡 뛰어오는 사람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비도 오지 않을 구름 한 점 없는 가을인데도 말이다. 알람 소리를 못 듣고 늦게 일어난 탓인데, 저녁밥을 먹자마자 이부자리에 누워도 강아지를 쫓는 아이처럼 불러도 오지 않는 것이 여행 전날의 잠이라 이해가 간다. 그 달콤한 사탕도 어른이 되면 멀리한다는데, 여행은 지팡이 짚은 어르신들도 삼삼오오 모여 관광을 떠다니 인간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매력을 가진 것 같다. 


 여행은 물고기가 되는 것이다. 여행하는 이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어항 속의 금붕어가 떠오른다. 드레스처럼 지느러미를 팔랑거리며 수초 사이를 빠져나가는 금붕어처럼 속된 생각 하나 없이 거리를 유유히 헤엄치기 때문이다. 미처 끝내지 못한 과제나 껄끄러운 대인 관계도 여행 중만큼은 잠시 넣어둔다. 먹이를 넣어주면 쉴 새 없이 뻥긋 거리는 금붕어의 입이 여행지의 맛집을 찾아가 배가 꺼지기도 전에 다음 음식점을 찾는 우리의 모습과 묘하게 닮아 있기도 하다. 어항 속의 금붕어도 좋지만 더 나아가 바닷속의 ‘니모’가 되는 것도 좋다. 여행의 묘미는 못 가본 길을 걷는 것이다. 우리 동네에서 제일 잘 나가는 골목대장도 다른 동네 골목 위에선 지나가는 코흘리개에 불과하다. 여행은 이처럼 낯선 곳에서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자기 발전의 양분으로 삼는 것이다. 오대양을 헤엄치고 다니는 바다 물고기처럼 여행자의 발길엔 주저함이 없어야 한다. 


여행을 떠난 후 주저 없이 헤엄치는 물고기가 되기 위해선, 여행을 가기 전에는 치밀한 건축가가 되어야 한다. 치밀한 설계에서 좋은 건축물이 나오듯, 꼼꼼한 계획이 의미 있는 여행을 만든다. 부모님의 성화에 못 이겨 캐리어처럼 끌려 다닌 여행은 돌아온 후 자신의 머리에 아무 기억도 남지 않는다. 여행을 떠나기 전 스스로, 꼭 들려야 할 곳과 지역 정보를 검색하는 일은 필수적이다. 서울 여행 중 버스를 타고 서대문 근처를 지나다가도 그곳에 백범 김구 선생이 서거하신 ‘경교장’이 있다는 것을 알면 빨간 단풍나무에서도 엄숙한 기운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여행은 단순히 타 지역을 방문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쳇바퀴 같은 일상 속에서 벗어나 깊은 호흡을 하는 것, 예상치 못한 변수에 대처하며 스스로를 알아가는 것, 이러한 인간적인 모습들이 여행지에서 평생의 짝을 만나는 이유이기도 하다. 꼭 해외가 아니어도 좋다. 국내에도 우리의 손길과 발길을 보듬어 줄 수 있는 천하 비경이 넘쳐난다. 꼭 먼 곳이 아니어도 좋다. 그대의 고장에도 조용한 가슴에 활기찬 씨앗을 심어 줄 멋진 여행지는 많을 것이다. 여행은 사치가 아니라 공부다. 공부는 끝이 없는 것이라고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매거진의 이전글 돈이란 무엇인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