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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iting Ko Nov 27. 2021

시시포스의 산을 거슬러

오필리아 영어교실 (1)

 오라이, 오라이. 벙거지를 뒤집어쓴 늙수그레한 인부가 목장갑을 낀 손을 휘휘 내저었다. 집 앞에 세워놓은 봉고차에서 살림살이를 끌어내리는 인부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덩치 큰 탁자들을 짊어지기 시작했다. 그런 인부들을 골똘히 쳐다보던 혜숙은 얇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내쉰 한숨에 지난 몇 년의 회한과 상념들이 서랍장 위의 먼지를 손가락으로 쓸어내듯 묻어 나왔다. 무엇인가에 떠밀리듯 이곳 안산에 흘러들어와 복덕방 이곳저곳을 제집 드나들듯이 오갔던 기억, 하루에도 수십 번씩 볼펜 끄트머리를 두들기며 보증금이니 월세니 하는 것들을 계산하던 것을 생각하면 물건이 오르내리는 지금 이 상황이 조금은 이질적이기도 했다. 어쩌다 여기까지 왔을까. 하염없이 봉고차의 번호판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혜숙의 머릿속을 헤집어 놓는 섬광 같은 질문이었다.


 혜숙이 집을 나온 것은 불과 3년 전이었다. 혜숙의 남편은 그날도 하염없이 소주병을 들고, 패악질을 부리고 있었다. 야이 씨발년아. 내가 너 같은 년을 왜 쳐 만나서 개같이 고생하고 있는 거냐? 아가리 달고 있으면 뭐라 씨부려봐. 엉? 혜숙은 묵묵히 그런 모진 말들을 듣고만 있을 뿐이었다.


 얼어붙은 듯 서서 색깔이 누렇게 바랜 방바닥을 잔뜩 덮은 유리 파편들을 관찰할 수밖에 없었다. 하루에도 몇 번이고 죽여버리겠다고 다짐했지만, 정작 그녀는 지난 12년 동안 축적했던 행동 패턴들을 반복하며, 이 끔찍한 시간이 끝나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그녀가 손에 잡기 좋은 흉기가 된 유리 조각들을 들 힘이 없어서, 욕지거리를 기관총처럼 쏟아붓는 저 목구멍에 흉기를 깊게 찌를 용기가 없어서도 아니었다.


 순전히 본인의 손끝에 달린 여섯 살 먹은 현우 때문이었다. 이미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한 편의 복수극이 완성되어 영화의 끄트머리에 엔딩 크레디트가 느릿느릿 올라갔을 테지만, 섣불리 크랭크인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하염없이 울고만 있는 저 꼬맹이를 두고, 흰옷의 왼쪽 가슴팍에 세 자리 숫자를 아로새길 수는 없었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럴 수는 없었다. 미안해. 제발. 내가 다 잘못했어, 응? 미안해 제발… 결국 혜숙은 비참하게도, 그녀의 머리칼을 한 움큼 붙잡고 있는 남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으며 울부짖으며 다시 12년 묵은 행동 패턴을 처음부터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새벽 두 시, 그녀의 남편이 다시 소주를 사러 집 밖을 나갔을 때였다. 싯누렇게 변한 이불 끄트머리를 붙잡고 하염없이 흐느끼던 혜숙은 옅은 핏자국이 검게 얼룩진 벽에 얼굴을 파묻었다.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버틸 힘이라고는 남아있지도 않았다. 엄마, 괜찮아? 현우가 금세 울 것 같은 목소리로 나지막이 물었다. 혜숙은 그런 현우에게 차마 괜찮다고 말할 수 없었다.


 지금 당장 지옥의 불구덩이 한복판에 떨어져 불타오른다 해도 차라리 감사할 지경에, 괜찮다고, 아무렇지 않다고 툭 내뱉을 그럴 용기가 쉽사리 나지 않았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그냥 사라져 버릴까 하고 생각하던 그녀였다. 그녀 주변에도 그런 사람들이 많았다. 쪽지 한 장을 남기고, 돈 벌어서 돌아오겠다는 무성의한 다짐과 함께 홀연히 사라져 버리는 그런 사람들. 돌아오지 않을 것을 잘 알고 있지만, 덤덤히 이를 받아들이는 현우 또래의 아이들. 이 중뿔난 동네에서 수도 없이 봤던 비극적인 인간 군상이었다.


 자신만큼은 그런 인간 군상의 틈 속에서 어떻게든 순수함을 유지하며 살아남을 것이라고 다짐하던 혜숙이었다. 하지만 눈물 자국이 버짐처럼 검게 진 현우의 얼굴을 어루만지면서, 그녀는 그녀가 신줏단지처럼 모셔왔던 신념이 머리맡에 놓여있는 두툼한 성경만큼 쓸모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현우야, 가자. 목적지는 없었다. 손가방에 지갑, 패물, 몇 장 되지도 않는 지폐들을 욱여넣고, 작년에 부평 지하상가에서 산 만 원짜리 잠바를 걸쳐 입었다. 그녀의 남편이 돌아오기 전에 이곳에서 떠야 했다. 기름칠을 먹이지 않아 불쾌한 소음을 내는 철문을 열어젖히고, 그녀는 현우를 품 안에 안으며, 그곳을 떴다. 영원히 산꼭대기에 바윗덩어리를 굴려 올리는 형벌을 받을 것만 같았던 시시포스가 그렇게 사라지던 순간이었다.


 사장님. 빨간 목장갑의 마디 부분이 잔뜩 헤진 인부가 혜숙을 불렀다. 십 칠만 원입니다. 눈 오는 날에 손 없는 날이라고 웃돈을 얹었더니, 퍽 높은 액수를 부르는 것 같았다. 지갑 속에서 지폐 한 뭉텅이를 꺼내 주었다. 수고하셨어요. 푸른색 봉고차가 골목길을 빠져나가는 순간까지 혜숙은 그 뒷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가자. 멋쩍게 쓴웃음을 지으며 혜숙은 반지하의 단칸방을 향해 다시 바윗덩어리를 굴려 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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