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Writing Ko Dec 01. 2021

푸른 파도의 끝자락에서

오필리아 영어교실 (2)

엄마, 여기가 우리 집이야? 현우는 새로 이사 온 집이 영 낯설기만 한 것 같았다. 그리 크지도 않은 집을 마치 예술 작품 감상하듯 두런두런 둘러보며 혜숙의 허리춤을 부여잡았다. 부엌 하나에 방 두 칸. 혜숙의 입장에서는 이 정도 되는 집을 싼 가격에 구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 한편이 든든해졌다. 당장 다음 달에 초등학교에 들어갈 현우를 위해 조금이라도 학교에서 가까운 집을 온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찾아 헤매었던 그녀였다.


수중에 들고 있는 몇 안 되는 쌈짓돈에 맞추기 위해 가보지 않은 복덕방이 없었고, 전봇대 곳곳에 꽂혀있는 벼룩시장이니 교차로니 하는 신문들을 마치 수집광처럼 긁어모으곤 했다. 200원짜리 모나미 볼펜의 뒷부분을 쉴 새 없이 딸깍거리며, 신문의 ‘전, 월세 정보’ 부분을 눈에서 진물이 날 만큼 읽고, 또 읽었다.  


하지만 혜숙이 바라는 그럴싸한 집들은 하나같이 터무니없이 비쌀 뿐이었다. 학교에서 가깝고, 상태 멀쩡한 집을 그리 순순히 내어줄 자비로운 사람을 쉽게 찾을 리 만무했다. 설령 혜숙의 재정상황을 맞출 수 있는 집들을 정말 어렵게 찾아도, 그녀 기준에서 말도 안 되게 후줄근한, 지은 지 족히 20년은 될 법한 그런 허름한 집을 찾는 것에 그칠 뿐이었다. 그런 그녀의 눈에 들어온 집이 이곳 반지하였다.


온 동네 사람들이 쓸고 지나가는 흙먼지를 꼼짝없이 들이마셔야 하는 그런 집이었지만, 혜숙은 마치 뭐에 홀린 듯이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그녀가 통장에 고이 모셔 놓고 있던 300만 원 남짓한 돈에 현금 다발 몇 뭉치로 구할 수 있는 최고의 매물이었다. 복덕방 주인도 혜숙이 퍽 마음에 들어 한다는 것을 대번에 알아차렸는지 그녀에게 쉴 새 없이 바람을 넣었던 터였다. 아이고, 사모님. 이만한 집이 없으셔. 이 동네에 있는 반지하 중에 여기보다 좋은 데 찾기 힘드실겨. 엊그제도 한 분 눈도장 찍어놓고 갔다니께.


혜숙은 길게 생각하지 않았다. 더 이상 집시처럼 이곳저곳을 떠돌기보다는 하루라도 빨리 어딘가에 정착하고 싶다는 거대한 욕구가 그녀를 계약서 앞으로 인도했다. 거리를 방황하는 집시의 삶을 이제는 끝내고 싶은 그녀였다.


남편에게 도망쳐, 모질게 추운 새벽길을 횡단하며 정처 없이 떠돌던 그날 밤이었다. 막무가내로 집을 나오긴 했지만, 갈 곳이 없었다. 혜숙의 콧등에는 눈물인지 콧물인지 모를 것이 뒤섞여 살얼음이 끼어있었다. 손가락 마디로 콧등 끝에 어루만지고, 불쾌하리만큼 끈적거리는 액체를 바지 옆단에 슥슥 닦아냈다.


어린 현우는 울음을 참는 듯 입을 앙다물고, 그런 혜숙 옆에 딱 붙어 있을 뿐이었다. 집에서 한 20분 거리에 있는 ‘월드컵 노래방’ 앞을 지나던 혜숙은 입구로 향하는 낮은 계단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새벽이슬인지, 누가 쏟은 술인지 모를 눅눅한 액체가 둔부 주위를 적시는 것은 신경 쓸 바가 아니었다.


다만 지금이라도 혜숙을 찾아 나서 동네를 이 잡듯 뒤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서슬 퍼런 남편의 눈에서 벗어나, 잠시 숨 돌릴 수 있는 그런 곳에 있다는 것이 중요했다. 혜숙은 요란하게 빛을 내는 노래방 간판과 네온사인을 등지고, 포개어진 무릎 틈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알 수 없는 무엇인가가 그녀를 깊은 곳으로 끌고 들어가는 것처럼 그녀는 더욱더 깊이 얼굴을 파묻었다.



남사스럽게 펑펑 울고 싶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런 단순한 감정의 파도에 휩쓸릴 혜숙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꼽추처럼 얼굴을 최대한 깊숙이 밀어 넣었다. 이내 머리가 으깨지듯 아파왔다. 거대한 파도가 머리 한복판을 세차게 후려치며, 부서졌다. 어디서부터, 대체 어떻게 잘못된 걸까.

엄마, 어디 아파? 그런 그녀의 귓가에 나지막이 들리는 현우의 목소리는 그녀를 더욱 미치게 만들었다. 갈기갈기 조각난 생각의 파도는 물보라를 일으키며, 혜숙을 집어삼키는 듯했다.


새벽녘에,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쓸려 무작정 뛰쳐나온 그 어설픈 행동 하나가 불러오게 될 일련의 사건들에 대해 아직 혜숙은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본인의 몸뚱이는 그렇다 쳐도, 여섯 살 먹은 현우의 인생까지 그녀가 답을 제시할 수 있을지 어쭙잖게 예상할 수도 없었다. 차라리 마음 편하게 다른 집 아낙네들처럼 댓바람에 홀연히 사라져 버리는 것을 택해야 했을까. 아니, 진작 몇 년 전에 차라리 이름 없는 강가에 몸을 던졌다면 조금은 나아졌을까.


비참하게도 혜숙은 그런 용기 있는 행동을 추진할 만큼 모진 사람은 못되었다. 그럴 때마다 참 모질게도 삶에 미련을 가졌다. 그녀가 삶을 부지해야 할 이유에 대해 정당화하려 했고, 또 합리화하려 했다. 그 수단은 언제나 그렇듯 어린 현우였다. 세숫대야에 동네 슈퍼에서 산 락스 한 병을 가득 채우고도, 그 속에 얼굴을 파묻지 않은 것도, 모두 그녀의 여섯 살 난 아들 때문이었다.


돌아갈 곳도, 더 이상 나아갈 곳도 없는 그녀에게 본인이 저지른 행동에 대해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더더욱 무의미하고, 소모적인 행위일 뿐이었다. 혜숙은 더 이상 생각하기를 관두었다. 가자, 현우야. 감기 걸릴라.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녀의 옆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아들을 짊어지고, 가로등 불빛이 듬성듬성 켜져 있는 이 길을 따라 하염없이 걷는 것뿐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시시포스의 산을 거슬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