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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iting Ko Jun 03. 2022

포장마차, 그때 그 자리, 그곳에서

오필리아 영어교실(3)

해가 뜰 때까지, 이 서러운 새벽이 끝날 때까지, 발이 닿는 대로 걸어보겠다고 다짐했다. 어깻죽지에 매달려 세상모르고 잠이 든 현우에게 좁디좁은 골목길 너머를 보여주고 싶었다.


새벽이슬을 옅게 머금은 아스팔트 길을 내디딜 때마다 들리는 잘박 잘박한 소리가 구슬프게 들릴 때쯤, 혜숙은 풀썩 주저앉았다. 얇은 비닐봉지에 담겨 있던 어묵 국물이 뜨거움을 견디지 못하고 왈칵 쏟아지는 것처럼, 혜숙의 머릿속을 헤집어 놓는 일련의 상념들은 그것들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혜숙을 덮쳤다.


죽고 싶다. 그녀의 머릿속을 관통하는 한 문장이었다. 이쯤 해서 죽는다고 해서 나쁜 것 없지 않을까. 저 지옥에서 죽지 않고, 지극히 평범한 인격체로서 사회에 배출되어 나와 죽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 아닐까. 그녀를 휘감고 있는 생각의 기저에는 잔혹하리만큼 허무함이 가득했다. 무릎 사이 안팎에 머리를 파묻은 혜숙은 금세라도 쓰러질 것 같은 현기증에 시달렸다.


엄마. 등 뒤에서 현우가 작게 읊조렸다. 깼어? 뒤늦게야 정신이 돌아온 혜숙은 아직 그의 아들을 어깨너머에 짊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 어디로 가? 잠에서 덜 깬 그의 아들이 나지막이 말했다. 혜숙은 쉽사리 입을 떼지 못했다. 이렇다 할 행선지 없이 막무가내로 집을 나온 그들에게 갈 곳이 존재할 리 없었다. 그는 어린 아들을 내려놓고, 한참을 할 말을 골랐다.


“현우야, 우리 이제 못 돌아가. 살던 집에. 안 돌아갈 거야. 오늘부터 밖에서 엄마하고 같이 살 거야. 알겠지?”

“밖에? 집 안 가도 돼?”

“안 돌아가도 된대도. 엄마가 현우 어린이집도 보내고, 친구도 많이 만나게 해 줄게. 그때까지만 조금만 참자. 알았지?”

“…”


현우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여섯 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아이에게 돌아갈 곳이 없다는 말이 얼마나 의미 있게 받아들여졌을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뭔가 주워 담을 수 없는 것을 된통 쏟아버려 어쩔 줄 몰라하는 그런 표정만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혜숙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현우의 정수리 부분을 어루만졌다.


“현우야. 먹고 싶은 거 있어?” 혜숙은 조심스레 입을 뗐다. 무슨 말을 해도 들리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이 숨 막히는 상황을 타개할 필요가 있었다.

“… 없어.” 현우가 잔뜩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랑 떡볶이 먹으러 갈래? 떡볶이 국물에 들어가 있는 오뎅 좋아하잖아. 응? 엄마가 많이 사줄게. 오뎅 국물도 마음껏 퍼먹자. 응?” 혜숙은 어린 현우의 팔목을 망연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아무것도 모를 어린 나이에, 새벽 공기가 얼마나 차가운지 피부로 느껴야만 하는 그런 아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다만 팔다리가 잘려 나간 병사에게 마약성 진통제를 놓아주는 의무병의 심정으로 그의 아들에게 떡볶이 한 접시를 먹여주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 순대도 먹을래.”

“그래, 그래. 얼른 저기 골목에 있는 포장마차 가서 먹자. 응?

“알았어.” 혜숙은 손끝으로 눈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이내 몰려오는 피곤함과 왠지 모를 긴장감에 몸 둘 바를 몰랐다. 누군가가 뒷목을 낚아채는 듯한 고통은 덤이었다.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런 그녀의 손끝을 현우는 꼭 움켜쥐었다.


“가자. 가자, 빨리.” 혜숙은 지친 발목을 이끌고 아직 해가 온전히 뜨지 못한 하늘을 우러러보며 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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