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잠들었는지, 쨍한 햇살이 커튼 틈 사이로 일렁거릴 때, 뱃속에서는 어제 게워내다 만 것들이 이때다 싶어 마저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쪼개질 것 같은 머리를 감싸 쥐며 핸드폰의 알람들을 차근차근 읽어나갔다.
매일 아침이면 남겨져있을 "일어났어?(이모티콘)"이라는 메시지가 보이지 않았다. 당연했다. 헤어졌으니까. 매일 아침마다 주고받았던 메시지가 사라지자 걷잡을 수 없는 허무함이 밀려왔다. 하루가 채 지나기도 전에 꿈에서 깨서 현실로 돌아온 것만 같았다.
어제 그렇게 비틀비틀 집에 들어와서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책상 위에 널브러져 있던 사진들을 모두 불태워버리려 했었다. 그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이었다. 서울 어디선가 찍은 인생네컷, 동네 어디선가 찍었던 사진들, 이런 게 요즘 유행이라며 주고받았던 서로의 증명사진들...
그 모든 것들을 지워버려야겠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방문을 열자, 거실은 자욱한 연기로 가득 차 있었다. 불이라도 났나 싶어 가스레인지 근처를 살펴보던 그때, 싱크대 속에는 미처 태우지도 못한 사진들이 곳곳에 널브러져 있었다. 군데군데 타들어 간 곳이 많은 사진들만이 싱크대 안을 가득 채우고 있을 뿐이었다. 그간에 쌓아 온 기억들을 흔적도 없이 털어버리려는 무의미한 행동에 불과했다.
태워먹을 거면 똑바로 라도 하지... 그는 어제의 자신에 대해 불평불만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사실 어제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해놓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상당히 만취해 있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리 이해 못 할 행동은 아니었다.
"우웨에엑. 우욱. 우와악." 토해낼 것도 없지만, 그의 위장은 샛노란 위액마저, 위장에 남아있는 한 방울까지 모두 긁어내려 하고 있었다. 화장실을 박차고 나오자, 매캐하게 탄 냄새가 다시 한번 거실을 가득 메웠다. 화장실에서 나오자, 그의 왼편에는 온갖 옷가지와 잡다한 것들이 흰색 재활용 봉투에 가득 채워져 있었다.
"이건 또 뭐야..." 그는 황당하리만치 가득 차 있는 봉투 끄트머리를 풀어헤쳤다. 그간 선물 받았던 옷들, 잡동사니들, 액세서리까지, 그 봉투 안에는 그간의 모든 것들이 정신없이 욱여넣어져 있었다. "가지가지하네 진짜..."
그는 다시 침대 위에 드러누웠다. 지난밤, 자신이 행했던 행동들이 적어도 자신의 집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에 새삼 안도하면서도, 이내 지울 수 없는 비참함과 슬픔이 뒤늦게 몰려왔다. 자세를 고쳐 누웠을 때, 시야에 들어오는 그와 그의 여자친구와 같이 찍은 사진들을 보며 그는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버려야 하건만, 지독한 숙취에 손 하나 까딱할 수 없는 그였다.
그때, 오른쪽 귀로 들리는, 신경을 거슬리는 진동소리가 들렸다. 귓구멍이 간질거릴 때쯤, 힘겹게 핸드폰을 들어 이 시간에 무슨 용건이 있어 전화했는지 몹시 궁금해졌다.
"예... 여보세요..."
"어, 잘 들어갔어? 연락이 없냐."
"뒤질 거 같다... 집이긴 해."
"괜찮어? 어제 다 죽어가던데."
"그럭저럭... 어제는 고마웠다."
"아니여, 형도 잘 쉬고."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마치 꿈속에서 헤매고 있는 것처럼, 제 아무리 손을 뻗어도 부서져내리는 가상현실에 놓인 NPC처럼,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그런 하루여야 하는데, 그의 하루는 몹시도 일그러져 있었다.
모든 이들, 그를 둘러싸는 모든 환경들이 그를 망가뜨리기 위해 작정한 전문 훼방꾼처럼, 지독하게 그를 잠식해 나갔다. 문득 별 것도 아닌 흔해빠진 이별일 뿐인데 괜히 자기 자신만 유난 떠는 것은 아닐까 스스로를 반박해 봤지만, 이는 단순한 자기 합리화에 불과했다. 당연히 이런 일을 겪는다면, 누구나 힘들어한다는 주변 사람들의 방대한 경험이 나를 위안할 뿐이었다.
나의 슬픔이 정당하다는 것을 수용하려던 그때, 머릿속을 천천히 잠식해 가는 한 가지의 질문이 있었다. 정말, 우리가, 다만 돈 때문에 헤어진 걸까. 멋들어진 생일 선물을 해주지 못해서였을까. 아니, 본질적으로 서로가 서로에 대해 품고 있던, 충족시킬 수 없는 어떤 것 때문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