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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윤 Jan 15. 2020

자아성찰과 반성 그리고 각오

N수생 7 계명

 마음속에 오만함이 가득했던 것과 다르게 약 3개월 간 쓰지 않던 두뇌를 다시 가동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의자에 계속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는 것도 힘들었고 문제를 푸는 것은 더더욱 그랬다. 예전 같았으면 금방 풀 수 있었던 문제도 스스로 '이걸 왜 못 풀고 있지?'라는 의문을 가지며 한참을 고민해야만 했다. 고등학교 3학년 말 수능을 보기 전 기량까지 다시 회복하는 데에만 약 한 달 여가량 걸렸던 것 같다.      


         

 기본적인 것조차 못 풀고 있으니 자연스레 내 마음속 가득했던 자만은 조금씩 사라져 가고 그 자리는 점차 자괴감과 열등감으로 가득 찼다. 그리고 괜찮게 공부를 하고 있다가도 갑작스레 급격한 우울감과 불안감이 엄습해오곤 했다. 아무리 이렇게 공부를 해도 다시 수능장에 들어가면 작년과 같이 멘탈이 나간채 무력한 상태로 되돌아 나오는 것은 아닐까? 하루 종일 책상 앞에 앉아있는 것보다, 이미 한 번 했던 것들을 지겹게 다시 반복하는 것보다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었다. 지금 하고 있는 것들이 모두 물거품이 되어 무의미하게 되어버렸을 때 그 패배감을 과연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나는 작년 수능 실패의 원인을 반드시 알아내야만 했다. 같은 실패를 반복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공부에 투자한 시간은 충분히 많았었다. 이것에 대해서 만큼은 주변 친구들 모두가 인정할 정도였으니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일까. 수능에서의 그 긴장감. 국어 지문이 전혀 읽히지 않았던 기억. 영어 듣기 문제를 놓쳐버린 공포. 그리고 수능 내내 찾아온 두통. 이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아직 학원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시기 토요일 점심이었다. 수업이 모두 끝나고 자습을 시작하기 전 담임선생님께서 교실 문을 열고 들어와 교탁 앞에 섰다.       


        

 "너희가 수능을 왜 망쳤는지 아니? 요행을 바랐기 때문이야. 너희들의 능력, 수준과는 상관없이 대박 나기만을 기도했잖아. 그렇지? 수능은 너희들의 잠재능력을 실험해보는 곳이 아니야. 너희들이 그동안 공부해온 모든 것. 그것을 온전히 그대로 보여주는 곳이지. 수능 대박. 수능을 잘 볼 수 있는 능력도 없으면서 잘 보기만을 바라니까 평상시 보던 것보다도 수능을 못 보고 여기에 오는 거야."               


 뒤통수를 강하게 얻어맞은 듯 머리가 얼얼했다. 그래, 나도 수능 대박을 기원했었지. 내가 가진 능력을 알고 있었으면서 내가 갈 수 있는 대학보다 더 높은 곳을 바랐어. 욕심. 그것이 나의 평정심을 잃게 하고 멘탈을 흔들어 놓았구나.               



 "수능이 끝이 아니다. 수능이 끝나면 너희는 다시 이 곳에 와서 논술 준비를 해야 하고 정시 지원을 고민해야 돼. 입시가 완전히 끝나고 합격증을 받는 그 순간까지 긴장을 놓아서는 안 되는 거야. 11월 셋째 주 목요일. 그 날에 너희의 계획을 마무리 짓지 말고 대학 합격을 확정 짓는 그 순간까지 최선을 다 해라."               



 만약 독학으로 재수를 했다면 이 단순하고도 당연한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을까? 아마 몰랐을 것 같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처럼 원인이 가까운 곳에 있을수록 찾아내기는 더 어려울 테니까.               


 담임선생님의 말씀은 나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었다. 그 이전까지는 수능 실패의 원인을 몰라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했지만 이제는 그 원인을 분명히 파악하고 내가 새로운 변화를 주면 작년과 다른 결과를 낼 수 있을 거란 믿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쉬엄쉬엄 대충 해야겠다고 생각했던 내가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재수를 결심한 때가 바로 이때였다.       


        

 나는 새롭게 다짐했다. 정말 앞으로 딱 1년. 1년 동안만 최선을 다해보자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쏟아부어보자고. 그리고 그렇게 했음에도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없다면 나와 수능은 맞지 않는 것이라고 겸허히 인정하고 그때 포기하자고.             


  

 재수를 제대로 시작하기로 마음먹으면서 나는 다음과 같은 목표를 세웠다.        


       

첫째, 교실에 앉는 그 순간부터 야간 자율학습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이 울리기 전까지 절대로 자지 않기
둘째, 학원에서 친구를 사귀지 않기
셋째, 자율적으로 등원하는 일요일 오전에 항상 1등으로 교실에 앉기
넷째, 술·담배나 영화·드라마·게임 등 공부를 방해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멀리하기
다섯째, 친구들과 되도록 연락을 끊기
여섯째, 매일매일 똑같은 일과를 살기
일곱째,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을 가지기      


    

 나는 내가 만든 7 계명을 마음속에 품고 이에 어긋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  


              

 통학버스를 타고 학원에 와 교실에 앉으면 나는 졸거나 자지 않기 위해 갖은 방법을 동원했다. 수업시간은 당연하거니와 쉬는 시간·식사시간에도 깨어있기 위해 펜으로 허벅지를 찔렀고 나중에는 교실 뒤편에 나가 서서 공부했다. 그리고 참다 참다 안 되겠다 싶을 때엔 복도에 있는 자판기에서 500원짜리 레쓰비 캔커피를 사 조용히 마셨다. 어찌 보면 미련할 정도로 졸음을 참았던 것 같다. 자는 게 더 나을 것 같다고 여겨질 때에도 절대 자지 않고 잠을 깨웠는데 무리하다 싶을 정도로 그렇게 한 이유는 하루 일과 시간에 수능을 보기 때문이었다. 사람에게도 관성이라는 것이 있어서 한번 아침에 잠을 자기 시작하면 계속 그것을 반복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그런 잘못된 습관 자체를 고치기 위해서 어떻게든 졸음을 깨우고 공부를 했다. 이러한 사소한 습관이 수능 날에도 영향을 줄 것이라 생각하면서.               



 학원에서 새로운 친구를 사귀지 않기 위해 외로움에 익숙해지려 했다. 다른 학원생에게 먼저 말을 건 적이 거의 없으며 상대방이 먼저 말을 걸어오면 거리감을 두기 위해 존댓말로 일관했다. 너무나 외롭고 힘들었지만 친구들과 친해지고 한두 마디를 섞게 되면 수험생활 중 슬럼프를 겪을 때마다 혼자 해결하지 못하고 친구들에게 의지하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수능이 끝난 지금도 연락하는 재수학원 친구가 한두 명뿐이다.               



 우리 학원은 일주일 중 하루인 일요일만큼은 오전 자유시간을 보장해주었다. 본래는 학원생들의 종교활동을 보장해주기 위함이지만 학생들이 그걸 지킬 리가 만무. 생활지도 선생님께서 등교를 확인하시는 오후 2시 이전까지는 쉬다가 시간에 딱 맞춰서 학원에 오는 게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나는 일주일에 하루라도 쉬면 그다음 날 다시 공부에 집중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아 그냥 평소와 똑같이 행동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 판단했다. 일요일에도 평소와 똑같이 일어나 1시간 30분 정도가 걸리는 지하철을 타고 오전 8시까지 학원에 매주 1등으로 등원했다. 아무도 없는 어두운 교실에 먼저 들어가 처음으로 형광등을 켤 때의 희열을 즐겼다. 그렇게 나는 수험기간 1년 동안 단 하루도 쉬지 앉고 공부했다.               



 공부에 방해가 될 수 있는 요소들은 모두 멀리했다. 술도 한 번도 마시지 않았고 담배도 입에 대지 않았다. 1년 동안은 모든 매체와의 소통에서 단절된 상태로 마치 수양하는 중처럼 살았던 것 같다.               


 친구들과도 연락을 끊었다. 페이스북 등 SNS 계정은 완전히 지워버렸고 친구들과 함께 있는 카카오톡 메신저 단체 톡방도 나가 앱을 삭제해버렸다. 정말 가끔씩 전화통화나 문자를 하는 것 말고는 친구들의 소식을 전해 듣지 못했다. 차라리 나는 그게 마음이 편했다.               



 나는 매일 아침 5시 50분에 일어나 간단히 씻은 후 아침밥을 먹고 집을 나섰다. 도보로 20분이 걸리는 이동통신사 건물 앞에 가면 노란색 통학 버스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버스에 올라타 영어 단어 책을 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학원에 도착. 오전 8시부터 저녁 6시까지 수업을 들은 뒤 저녁을 먹었다. 저녁 식사 후에는 11시까지 쉬는 시간 없이 야간 자습이 진행되었다. 하루 동안 부족했던 공부를 마저 하는 시간. 작년만 해도 12시까지 했던 자습이기에 11시 자습이 그리 길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자습이 모두 끝나면 그제야 나는 통학 버스를 타고 집에 왔다. 도착하면 시곗바늘이 대략 오전 12시 10분을 가리키고 있었고 간단히 씻고 간식을 먹은 뒤 12시 30분이 되어서야 잠에 들었다.               



 일요일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진 않았다. 똑같은 시간에 일어나 똑같은 시간에 출발하여 대략 8시 2~30분쯤 학원에 도착했다. 오전부터 오후 9시까지 중간중간 도시락을 먹어가며 자습을 하면 어느새 귀가 시간이 되었고 평일과는 다르게 10시 반쯤 집에 도착해 쉴 수 있었다.       


        

 재수를 하는 1년 동안 나는 정말 단 하루도 쉰 적이 없다. 사실 나라고 해서 처음부터 그럴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단지 하루를 쉬게 될 때의 그다음 날 다시 공부에 집중하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아 그것이 두려웠을 뿐이다. 오래 달리기를 하다 중간에 쉬고 다시 달리려고 하면 무척이나 힘든 것처럼 공부도 마찬가지다. 차라리 집중은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매일처럼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 난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매일매일을 똑같은 하루를 살았다.            


   

 마지막으로 내가 다짐한 것은 나 자신에 대해서 믿음을 가지는 것이다. 첫 번째 수능을 망친 이후 나는 나 자신에 대해 강한 불신을 가지고 있었다. 충분히 열심히 공부했음에도 불구하고 택도 없는 성적으로 배신을 당한 것에 대해 회복하기 힘든 상처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재수를 하기로 결심하면서 다시 한번 나를 믿어주기로 했다. 실패를 통해 얻은 교훈으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게, 매일매일 작년 수능에서의 그 분위기를 떠올리며 최선을 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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