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심 작가 진절 Nov 17. 2023

아들의 수능날

수능 1세대 아빠의 라떼 수능 이야기 

오늘 큰 아들이 수능을 보는 날이었다. 아마도 말 그대로 보기만 했을 것이다. 평소에도 공부를 안 하기로 유명했지만 수능을 앞두고 더욱 적극적으로 공부를 안 했기 때문에 아마도 수능이라는 빅 이벤트를 온몸으로 체험하는데 목적이 있었던 듯하다. 공부를 잘하건 못하건 그래도 아들의 수능날이기에 예의상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서 시험장까지 모셔다(?) 드리고 일터로 향했다. 대충 찍고 잘 거라고 호언장담하면 걸어가는 아들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기억 속 아주 희미하게 남아있는 30년 전 기억의 파편들이 떠올랐다.




1991년 고등학교에 입학을 했다. 기억이 정확하진 않지만 나의 중학교 성적은 그럭저럭 애매한 수준이었다. 공부로 주변의 기대를 받는 편이 아니었던 것은 확실하다. 당연하게도 고등학교에 입학해서도 그다지 주목받는 실력은 아니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면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냥 중학교 때부터 수학과 음악에 대해서는 애착을 넘어 집착의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여하튼 1991년 당시만 해도 대학교를 가려면 학력고사를 봐야 했던 시기이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입제도가 학력고사에서 수학능력시험으로 바뀐다고 하여 전국이 들썩거렸다. 그것도 1년에 2번을 봐서 좋은 성적으로 대학을 간다고 했다. 나는 애초에 공부에 크게 관심을 두고 있지 않은 학생이다 보니 그거나 저거나 별 감흥이 없었다. 그렇게 떠들썩한 가운데 치른 중간고사, 기말고사의 성적은 대충 15등 내외였다. 그 옛 날에는 한 반에 55~56명 정도였으니 공부를 안 한 것 치고는 그래도 상위권에 속하긴 했으나 서울 안에 있는 대학을 갈 수준은 아니었다.


그리고 치러진 첫 번째 수능 모의고사를 보고 나서 나는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여전히 공부를 하지 않았음에도 어찌 된 영문인지 문제를 술술 풀고 있었던 것이다. 그냥 풀기만 하는 게 아니라 뭔가 답을 맞추고 있다는 느낌적인 느낌을 받으면서 말이다. 첫 모의고사가 끝나고 받아본 성적표를 보고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정확한 수치는 아니지만, 내신 석차 15등 수준이던 내가 반에서 5등 내외의 성적을 기록했고, 수학에서는 그보다 더 높은 2~3등을 한 것이었다. 


내신이나, 기존 학력고사는 오로지 암기가 중요한 덕목이었으니, 나처럼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는 사람은 좋은 성적을 받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수능은 단순 암기를 넘어서 복합적 사고를 요하는 방식이라 나 같은 사람에게는 매우 유리한 시험임을 첫 모의고사를 보고 깨닫게 되었다. 한 번 그 맛을 보고 나니 공부에 조금은 흥미를 갖게 되었고, 그 뒤로 수능 문제집 위주로 공부를 시작하였다. 물론 공부 시간의 80% 이상을 수학에 할애하기는 했으나 어쨌든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하게 될 수 있었다.


그렇게 3년 내내 모의고사는 항상 반 5등 / 전교 50등 이내의 성적을 거뒀고, 교무실 앞에 내걸린 모의고사 석차가 적힌 대자보에 내 이름이 당당히 올라갈 수 있었다. 여담으로 나와 똑같은 이름을 가진 옆 반 반장이 있었는데 모든 면에서 그 친구는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고 얼굴도 잘 생겨서 항상 인기가 많은 아이였는데 이상하게도 수능 모의고사 성적만 좋지 않았다. 하지만 너무 당연하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자보에 올라와 있는 이름이 내가 아니라 그 친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아무리 그게 나라고 설명해도 대부분 믿지 않는 분위기였다. (눈물 ㅠㅠ)


아무튼 그렇게 3학년 여름에 1차 시험을 봤는데 모의고사와는 달리 성적이 좋지 않았다. 11월에 있을 2차 시험에 기대를 걸어봤지만, 그해 최악의 난이도 조절 실패로 모든 수험생들이 1차에 비해 30점 이상 낮게 나오는 결과로 안 보니만 못한 시험이 되어버렸다. 그 1차 시험의 성적으로 여러 대학을 써보았지만 모든 대학에 떨어지게 되었고 결국 고민 끝에 재수의 길을 선택하게 되었다.


집안 형편이 넉넉지 않았기에 재수하는 동안 단과 학원 1과목(수학)만 끊고, 학원 안에서 여러 강의실로 메뚜기를 뛰며 모의고사 위주로 공부를 했고, 1년간 노력한 결과로 아주 만족스럽진 않았으나 전년보다는 좋은 성적을 받았다. 그렇게 여러 대학에 원서를 내었고 천신만고 끝에 홍익대학교에 턱걸이 합격을 하게 되었다. 수능과 함께 처음으로 도입된 선시험 후지원 제도에 의해 복수 지원이 처음으로 허용되었고, 33명 정원에서 예비합격 66번이었기에 나는 큰 기대를 하지 않았으나 예비합격자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면서 간신히 홍대 불문과에 문을 닫고 들어가는 기적이 이뤄진 것이었다.


그 뒤로 거의 30년이 지난 지금 내가 현재 하고 있는 이 일이 홍대에서 만난 선배님과 인연을 맺으며 시작이 되었고, 그 뒤로 흘러 훌러 여기까지 오게 되었으니 결과론적으로 학력고사에서 수능으로 바뀌는 바람에 나의 인생도 완전히 바뀌어버린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금도 이따금씩 생각하고 있다. 고등학교 입학했을 때만 해도 대학에 큰 기대가 없었던 내가 인서울 대학에 들어갔다는 사실은 지금도 믿겨지지 않는다. 수능이라는 고마운 선물을 준 노태우 대통령 할배한테 약간의 고마움이 느껴지는 밤이다. 




큰 아들은 나와 마찬가지로 머리는 매우 좋은 편이나 노력을 전혀 하지 않는 스타일이다. 이렇게 공부를 안 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공부를 하지 않는다. 그렇게 시험을 보니 내신은 5~6등급 정도를 받게 되었고 바닥이 아닌 걸 감사하게 생각하는 정도였다. 아들 역시 대학에 큰 관심을 두지 않고 있어서 정말 대학에 안 가려나 했는데, 어느 날 불쑥 성적에 맞춰 집 근처 전문대라도 가겠다고 선언했다. 얼마 전 결과가 발표가 되었는데, 예비합격 7번이라고 한다. 작년에 같은 과 추가합격이 200번대였으니 무난히 합격할 것으로 예상이 된다. 


오늘 수능장으로 향하는 마음 자세가 수능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다른 친구들과는 사뭇 다른 마음이었겠지만 그래도 처음으로 보는 수능시험이 조금은 긴장이 되었는지 태연한 척하는 말투 속에 달리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 이미 합격(?)한 전문대에서는 수능 최저점 같은 기준도 없기 때문에 수능 점수가 아무 의미가 없겠지만 평생 처음이지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수능 시험이기에 좋은 경험이 되었으리라..


웰컴 투 전쟁터!


 


매거진의 이전글 운, 조력자, 그 다음에 나의 노력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