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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심 작가 진절 Dec 18. 2023

익숙한 길에서 막다른 길을 만나다

비유적 표현이 아니라 실제로 있었던 일

처음 가본 동네가 아니었다. 바로 내가 살고 있는 동네에서 한 번도 아니고 몇 번의 막다른 길을 만났다. 늘 큰 길로만 다니던 길이었는데, 그 뒷골목에 어귀에 있던 병원에 들렀다가 호기롭게 뒷골목을 통해서 빠져나오려고 했다. 한 번도 가본 적은 없지만 매우 익숙하다고 생각했고, 골목길을 최단 거리로 샤샤삭 빠져나올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길은 상상했던 모습과 매우 달랐다. 추운 날씨와 헛된 자신감으로 지도 어플 따위는 열어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랬던 그 길에서 몇 번의 막다른 길을 만나자, 왔던 길을 몇 번이나 다시 돌아가며 나는 조용히 투덜댔다. 


"겨울이 되니까 부쩍 살이 쪘네. 당장 걷기 운동이라도 해야겠어"


불과 어제 이런 얘기를 했던 내가 고작 30m도 안 되는 길을 돌아가면서 투덜대다니... 나의 이중성에 혀를 내둘렀다. 막다른 길이 나에게 몇 걸음이라도 더 걷도록 강제 운동을 시켜준 것에 감사해도 모자랄 판에 말이다. 물론 3초 만에 다시 마음을 고쳐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발걸음을 돌리긴 했지만 그 찰나의 투덜거림에 약간 셀프로 부끄러운 순간이었다. 




우리는 익숙한 공간, 익숙한 사람, 익숙한 관계에 대해 속속들이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곤 한다. 하지만 실상 몇 십 년을 함께한 부부 사이에서도 가끔 낯선 모습을 발견하기도 한다. 상대에 대해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조금만 더 안으로 들어가 보면 전혀 다른 길들이 나타난다. 그 길은 우리 동네 뒷골목과 같아서 뚫렸다 싶다가도 막혀있고, 막혔나 싶다가도 뚫려있기도 한다. 


비즈니스의 세계에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아무리 친하고, 막역한 관계라 할지라도 항상 처음 가는 길처럼 내비게이션 켜고 조심조심 안전 운전을 해야 한다. 때로는 갑작스러운 장애물이 튀어나올 수도 있고, 때로는 교통 체증으로 꽉 막힌 도로에서 답답함을 느낄 수도 있다. 엄청 친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한순간에 돌변하여 냉혈한으로 바뀔 수도 있고, 철천지 웬수(원수 아니고 웬수)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갑자기 따뜻한 손을 내미는 경우도 있다. 깜빡이도 없이 갑자기 치고 들어오는 것이 바로 비즈니스 세계의 문법이다.


내가 가장 잘하는 것이 인간관계이면서도 내가 가장 서툰 것이 또한 인간관계이다. 이유인즉슨 비즈니스와 사적 친분의 경계를 명확히 구분하지 못하는데서 기인한다. 그것이 어렸을 때, 사회적으로 낮은 위치에 있을 때에는 크나큰 장점으로 인정받았다. 비즈니스 관계로 시작해서 사적인 친분관계로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그 유연함이 분명 장점이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장점은 어느덧 단점으로 변해있었다. 특히 나이가 들고 사회적 위치가 다소 높아지고부터는 그 모호한 경계 설정이 엄청난 파장을 일으킨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왜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지 그 이유를 명확하게 규정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저 시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변해가는 관계와 경계를 면밀히 파악하면서 기민하게 대응하는 수밖에 없다. 최근 한 형님께서 해주신 이야기가 너무 '맞말'이라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너는 일로 만난 사이에서도 조금만 마음이 맞다 싶으면 너무 경계 구분도 없이 깊숙이 다가가려고 하는 경향이 있어. 그게 무조건 나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정작 상대방은 선을 그어놓고 있는데 혼자서 선을 넘어가면 태도가 돌변할 수밖에 없는 거야. 그럼 그 모습을 보고 너는 또 혼자 상처받는 거지. 특히 너의 현재 위치를 생각했을 때 더더욱 그런 비즈니스적 거리 두기가 필요해."


사실 이 얘기는 집에서 아내에게서도 귀가 따갑도록 들었던 이야기이다. 하지만 나는 동의할 수 없었다. 아니 그것을 동의하는 순간 나의 삶이 부정당하는 것 같아 동의하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형님에게 똑같은 이야기를 듣고 나니 내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 그때는 맞았고, 지금은 틀렸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내가 최근에 ㅇㅇ이란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 생각보다 착하고 말도 잘 통하더라고. ㅎㅎㅎ"


이런 내 말을 들은 아내는 나를 바라보며, '이 사람 또 정신 못 차리고 이러네...'라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마 몇 번의 만남이 있은 후 '그 사람 알고 보니 생각보다 별로인 거 같어'라는 말이 내 입에서 나올 것을 이미 예상하고 있는 사람처럼 말이다.


무려 25년이나 된 아내의 마음도 제대로 모르면서, 10년 가까이 동고동락한 직원들의 마음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면서, 몇 번 만나지도 않은 사람의 마음을 꿰뚫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나의 그 자신감은 이제 고이 접어두어야 할 것 같다. 익숙한 관계도, 익숙한 길도 언제나 처음처럼 조심조심 소중히 다루는 연습이 필요한 시점이다.


(PS : 집 근처 골목길을 걷다 막다른 길 몇 번 만난 거 가지고 무슨 이야기를 이렇게나 거창하게 확대 해석하는지.. 푸헐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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